롯데와 신세계. 어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국내 유통업계 최고의 맞수다. 수 십 년 전부터 백화점과 할인점이라는 전통적 사업은 물론 복합쇼핑몰, 프리미엄 아울렛, 온라인 쇼핑몰, SSM(기업형 슈퍼마켓) 분야에서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다. 이뿐만이 아니다. 커피, 제빵 등 식품 부문과 가전유통 사업에서도 두 유통 공룡의 대결 구도는 팽팽하다. 이번엔 ‘화장품’으로 맞붙었다.

지난달 26일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서울 핵안보정상회의 배우자 특별 만찬장. 김윤옥 여사는 각국 정상부인들에게 한 국내 브랜드의 화장품을 공식 선물로 증정했다. 이 화장품 브랜드는 한국의 아름다움을 선물한다는 의미로 김 여사가 직접 고른 것이라고 전해져 화제가 됐다. 이튿날 저녁 특별만찬 자리에서는 김 여사의 지적이고 생동감 넘치는 분위기를 연출한 메이크업 브랜드로 회자되며 다시 한 번 주목 받았다. 화장은 연예인 메이크업과 스타일링으로 명성을 얻은 메이크업 아티스트 이경민 씨가 담당했다.

신세계, 아티스트 브랜드 ‘비디비치’로 도전장
국제적인 외교 무대에서 이름을 알린 이 브랜드는 ‘비디비치’. 이씨가 2005년 출시한 색조 전문 화장품 브랜드로 대중적 인지도가 높고 마니아층도 다수 거느리고 있다. 국내 메이크업 아티스트 브랜드로는 처음으로 글로벌 공식 석상에서 소개됐다. 비디비치에 관심이 집중되는 이유는 또 있다.

신세계그룹이 화장품 사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드는 신호탄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신세계는 최근 계열사 신세계인터내셔날을 통해 비디비치코스메틱 지분 70%를 총 60억원에 인수했다. 비디비치 인수를 마무리 지음으로써 2001년 일본 화장품 브랜드 ‘슈에무라’의 국내 판권계약이 종료된지 11년 만에 화장품 사업에 직접 나서게 된 것이다.

이번 인수는 유통망과 운영 노하우 부족으로 경영난을 겪고 있던 비디비치 측에서 먼저 경영제휴를 제의해 이뤄졌다. 신세계인터내셔날 관계자는 “한국화장품이나 코리아나 등도 유력한 인수 후보로 거론됐으나 비디비치의 경우 외국계 색조 브랜드가 주도하는 백화점에서 상품력을 인정받은 국내 브랜드다. 매출 잠재력이 높을 것으로 판단돼 최종 인수를 결정했다”고 말했다.

신세계는 비디비치를 글로벌 시장을 겨냥한 고급 색조 전문 브랜드로 육성할 계획이다. 신세계의 화장품 사업 진출은 패션전문 자회사인 신세계인터내셔날의 종합 패션기업으로의 성장 발판을 마련하려는 포석으로 풀이된다. 신세계의 새로운 행보에 관심은 최근 화장품 사업에 힘을 쏟고 있는 라이벌 롯데에 자연스럽게 쏠린다.

롯데, 맞대응 대신 스킨케어 브랜드 ‘아스타리프트’선봬
롯데그룹은 계열사인 한국후지필름을 통해 일본 스킨케어 브랜드 ‘아스타리프트’를 국내에 론칭하며 화장품 사업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한국후지필름은 지난달 29일 “후지필름의 첨단 과학기술로 만든 글로벌 화장품 브랜드 아스타리프트를 한국 시장에 공식 론칭한다”며 “2007년 일본에서 첫 출시돼 현재까지 홍콩, 싱가포르, 중국, 대만, 말레이시아에 이어 한국, 영국, 프랑스에 동시 론칭했으며 올해 안에 이탈리아와 독일에도 진출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25~35세의 여성을 주 타깃으로 하는 아스타리프트는 모든 제품에 탄력 극대화 성분 ‘트리플 콜라겐’과 수퍼 항산화 성분 ‘아스타잔틴’을 함유한 프리미엄 토털 안티에이징 화장품 브랜드. 4월부터 온라인쇼핑몰 롯데닷컴에서 판매되며 올 하반기 내 백화점에 입점될 예정이다. 또 롯데제과는 지난해 롯데제약을 흡수합병해 화장품 제조 및 판매업을 추진할 계획이다.

여기에 신격호 롯데그룹 총괄회장의 외손녀이자 신영자 롯데쇼핑 사장의 막내딸인 장정안씨가 지난 1월2일자로 그룹 계열사인 화장품 도소매 업체 에스앤에스인터내셔날의 등기이사로 등재된 데 대해서도 예의주시하는 상황. 장씨가 백화점 바이어 등의 경험을 살려 에스앤에스인터내셔날의 일본 화장품 브랜드 ‘SK-Ⅱ’ 가두점 사업에 주력할 것이란 전망 때문이다. 올해 화장품 시장에서 롯데그룹 계열사들의 활약이 기대되는 만큼 롯데의 화장품 사업 보폭은 점점 넓어질 것으로 해석된다.

업계에서는 화장품 시장에서 벌어질 롯데와 신세계의 맞대결이 만만치 않을 것이란 얘기가 나온다. 업계 한 관계자는 “이번 신세계의 화장품 사업 진출은 단순히 제품을 수입·판매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 업체를 사들여 제조부터 유통, 판매까지 아울러 자체 사업을 한다는 점 때문”이라며 “이전의 슈에무라 국내 판매와는 투자 규모나 사업 전개 등에서 차원이 다르다”고 말했다.

또 경영 위기에 내몰린 브랜드들을 인수해 성장시킨 신세계인터내셔날의 탁월한 경영능력을 볼 때 비디비치도 글로벌 브랜드로 충분히 키워낼 것이란 관측이다. 신세계인터내셔날은 경영난으로 위기를 겪던 패션 브랜드 ‘보브’와 ‘지컷’을 인수해 인수 당시보다 각각 3배, 18배가량 늘어난 매출을 올리는 탄탄한 브랜드로 성장시켰다. 신세계인터내셔날 홍보팀 박초롱 주임은 “지난해 10월 부도가 난 패션 브랜드 ‘톰보이’도 인수해 최근 재론칭했는데 한 백화점에서 여성 캐주얼 브랜드 매출 2위에 올랐다”며 “톰보이는 물론 보브, 지컷 등을 인기 브랜드로 재탄생시킨 노하우를 발휘해 비디비치를 더욱 경쟁력 있는 브랜드로 성장시킬 것”이라고 설명했다.

화장품 시장에서 부딪치게 된 롯데와 신세계 양 측은 서로를 경쟁적으로 의식하지 않는다는 입장이다. 신세계 측은 “비디비치 인수가 롯데의 아스타리프트 론칭에 맞대응하기 위해서라는 일각의 시선은 사실이 아니다”라며 “시기적으로 우연히 맞아 떨어졌을 뿐이다.

기초 제품 위주의 아스타리프트와 색조 브랜드인 비디비치는 경쟁 분야가 다르다”고 일축했다. 롯데도 “아스타리프트를 통한 화장품 사업은 오래 전부터 후지필름의 사업 다각화 측면에서 추진된 것”이라며 “후지필름 라이프사이언스 연구소의 콜라겐 기술과 롯데의 유통망을 경쟁력으로 내세워 성공할 수 있는 신성장 동력”이라고 말했다.

화장품 업계, 대기업 진출 장기적 경계론

국내 화장품 시장의 경쟁은 갈수록 치열하다. 화장품 분야는 매년 10% 이상 성장하는 고부가가치 산업인 데다 진입 장벽이 낮아 시장에 뛰어드는 기업들이 대거 늘고 있어서다. ‘리엔케이’를 론칭한 웅진코웨이, 소망화장품을 인수한 KT&G 등에 이어 풍부한 자금력과 유통망을 보유한 롯데와 신세계가 본격적인 화장품 사업에 나섰으니 전운마저 감돈다. 화장품 시장에 지각변동은 일어날 것인가. 이에 대해 당장은 큰 변화는 없을 것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화장품 사업이 시작에 비해 유지 및 성장이 쉽지 않고 아모레퍼시픽과 LG생활건강의 막강한 양강 체제의 구도를 무너뜨리기에는 아직 역부족이라는 해석이다. LG생활건강 관계자는 “아모레퍼시픽과 LG생활건강은 매출 1조원이 넘는다. 2000억~3000억원 매출을 올리는 다른 업체들과는 격차가 상당하다”며 “롯데와 신세계가 뛰어든다 해도 당장은 큰 변화는 없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러면서도 그는 “장기적으로는 풍부한 자본과 다양하고 종합적인 유통채널을 갖춘 대기업이 위협적인 존재로 부상할 수 있다”며 신중한 모습도 보였다.

김민정 KTB투자증권 연구원은 “롯데와 신세계가 막강한 유통채널을 통해 손쉽게 사업을 확장할 수 있겠지만 1, 2위 브랜드의 시장 지배력이 워낙 크기 때문에 1~2년 내로는 시장점유율에 큰 영향은 없을 것”이라며 “대기업 진출이 시장 붐업(Boom-Up)과 성장을 견인하는 요인이 될 수 있다”고 분석했다.

전희진 기자 hsmi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