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믹리뷰=최진홍 기자] ‘슬세권’ 트렌드가 불어오고 있다. 슬세권은 슬리퍼와 세권(勢圈)의 합성어로, 슬리퍼를 신은 편안한 복장으로 다양한 활동을 즐길 수 있는 권역을 칭하는 단어다. 처음에는 거주지 주변의 편의시설을 얼마나 잘 활용할 수 있느냐라는 개념으로 지칭되는 등 주로 부동산 업계에서 통용된 단어였으나 지금은 코로나19 이후 사회적인 트렌드로 크게 회자되고 있다.

재미있는 대목은 포스트 코로나의 트렌드로 자리잡은 슬세권이 ICT 기술과 만나 다양한 가능성을 타진하는 대목이다. 유통 및 물류의 라스트 마일과 거점 온디맨드 플랫폼 전략의 유연한 변신에 시선이 집중된다.

▲ 슬세권이 각광받고 있다. 출처=갈무리

“지하철서 5분!” 슬세권의 태동과 2.0

지금까지 슬세권이라는 단어는 주로 부동산 업계의 트렌드 중 하나로 여겨졌다. ‘거주지와 지하철의 거리가 5분’ ‘할인점이 집 코 앞에’ ‘산책할 수 있는 공원이 10분 거리’와 같은 부동산 분양 광고 모두 슬세권의 초기 버전으로 볼 수 있다.

슬세권의 2.0버전도 있다. 말 그대로 ‘슬리퍼를 신고 이동해도 편안하게 여가활동을 즐기는 것’이라는 트렌드다. 실제로 2.0 버전은 지하철이나 대형마트가 거주지와 가까운 거리에 있다는 수준을 넘어 복장을 갖추지 않고 슬리퍼 하나만 신은 상태에서 거주지 가까운 곳에 부담없이 다양한 편의시설을 즐길 수 권역을 말한다.

단순히 편의시설이 거주지와 가까운 곳에 있다는 개념이 아니라, 생활 속 익숙한 풍경의 서비스로 주변의 편의시설을 부담없이 즐기는 개념이다. 대형마트보다는 작은 상점이, 프랜차이즈 카페보다는 동네 커피점이 슬세권 2.0의 버전에 더욱 부합된다. 여기에는 1인 가구의 확장도 큰 영향을 미쳤다. 소소한 외출과 소비 패턴을 보이는 1인 가구의 경우 슬세권의 트렌드와 정확하게 부합되기 때문이다.

포스트 코로나, 슬세권에 힘 실어주다

거주지 근처의 다양한 편의시설을 슬리퍼와 같은 편안한 복장으로 둘러볼 수 있는 슬세권 트렌드가 최근 코로나19 정국을 기점으로 더욱 확장되고 있다. 전염에 대한 우려가 커지는 가운데 거주지 근처의 편의시설만 제한적으로 이용하려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하나금융연구원이 발표한 코로나19가 가져온 소비 행태의 변화 보고서에 따르면 3월 기준 일반 음식점 매출은 감소세가 뚜렷하지만 정육점의 매출은 늘어나 눈길을 끈다. 한신은 –32%, 중식은 –38%의 매출 하락세를 보였으나 정육점은 오히려 3% 올랐다.

농산물 매장도 10% 매출이 늘어나 식자재를 구입해 집에서 요리하는 홈쿡족들이 많아졌음을 알 수 있다.

코로나19로 이커머스 플랫폼이 크게 성장하고 오프라인 매장이 커다란 타격을 받았지만, 골목마다 있는 편의점과 슈퍼마켓의 매출은 오히려 올랐다. 백화점은 –23%, 대형마트는 –17%의 매출 하락세를 보였지만 편의점은 6% 매출이 상승했고 슈퍼마켓은 12%나 매출이 증가했기 때문이다. 거주지 근처에 머무는 시간이 많아지며 슬세권이 각광받았다는 뜻이다.

자전거 판매 매출이 폭증한 대목도 눈길을 끈다. 3월 매출 증가세가 무려 69%에 이른다. 긴급재난지원금 활용처이면서 근거리를 이동할 수 있는 매개체라 많은 사람들이 자전거 구입을 선택한 것으로 풀이된다.

골목에 있는 동네카페 매출도 크게 늘었다. 소매 데이터 분석 기업 닐슨코리아에 따르면 3월 둘째주부터 넷째주까지 소규모 커피 매장의 결제 건수는 2월 셋째주부터 3월 첫째주에 비해 무려 24.6% 상승했다. 상위 20개 프랜차이즈 매장이 동일한 기간 –6.4%의 매출을 기록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의미심장한 변화다. 슬세권 트렌드 중 하나다.

▲ 동네카페 매출이 크게 올랐다. 출처=갈무리

슬세권과 ICT가 만나면

1인 가구의 등장과 부동산 시장의 트렌드로 여겨지던 슬세권이 코로나19 정국과 맞물리며 각광받는 가운데, ICT 기술과의 화학적 결합에도 시선이 집중된다.

특히 코로나19로 기업의 재택근무 트렌드가 늘어나며 슬세권과의 시너지가 예상된다. 정확히 말해 기업의 재택근무를 가능하게 만들어주는 ICT 기술이 발전하며 재택이 삶의 일상이 된 사람들의 슬세권 트렌드가 강해진다는 뜻이다.

사실 재택근무는 지금까지 ‘임시방편’의 이미지가 강했으나,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ICT 기술이 발전하며 재택근무를 기업근무의 중요한 ‘루틴’으로 삼는 분위기가 감지되기 때문이다. 실리콘밸리의 트위터가 대표적이다. 트위터 CEO 잭 도시는 지난 13일 직원이 원할 경우, 무기한 재택근무가 가능하도록 지원한다고 밝혔다.

코로나19 이전부터 탈집중화(Decentralization)에 우선순위를 두고 직원들이 회사를 떠나 세계 어디서나 일할 수 있는 환경을 구축하기 위해 노력한 상황에서, 코로나19로 인한 재택근무의 가능성을 엿본 것으로 보인다. 트위터는 "지난 몇 달 동안의 경험을 통해 재택근무의 연속성이 가능함을 확인했고, 이제 원하는 직원은 앞으로 계속 재택근무를 선택할 수 있다 발표한 것"이라 말했다.

페이스북도 비슷한 행보를 보이고 있다. 마크 저커버그 페이스북 CEO는 22일 “르면 5년 내에 4만5천 명에 달하는 직원 중 절반은 재택근무로 전업할 것”이라면서 “올해 말까지 모든 직원을 대상으로 재택근무를 시행할 계획”이라 밝혔다.

▲ 마크 저커버그 페이스북 CEO. 출처=갈무리

ICT 기술의 발달로 비대면 업무의 가능성이 열린 가운데, 이러한 트렌드는 슬세권 트렌드 강화에 큰 역할을 할 전망이다. 나아가 원격의료 및 온라인 개학 등 다양한 영역에서 비대면 방식이 자리잡을 경우 슬세권 트렌드는 더욱 파괴적인 존재감을 자랑할 것으로 보인다.

O2O 전략을 추구하는 온디맨드 플랫폼의 거미줄같은 거점 전략도 비슷하다.

ICT 기술의 발달로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연결이 강화될 경우 ‘온라인의 구매 – 오프라인의 활동’이라는 비즈니스 공식이 고착화될 전망이다. 이미 이커머스와 물류의 만남 등 입체적인 시도가 이어지는 가운데, 지역 거점을 최대한 많이 확보하며 고객의 끊김없는 라스트 마일을 시도하는 것은 업계의 중요한 목표 중 하나다. 고객을 이해하는 한편 슬세권으로 좁아진 소비 패턴을 활용해 ICT 기술로 라스트 마일 사용자 경험을 추구하는 장면은, 역시 슬세권의 중요도를 더욱 키우는 결과가 될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