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믹리뷰=최지웅 기자] 국내 제약산업은 척박한 환경 속에서 제약주권을 지켜내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2000년대 들어 의료분업과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등 산업 안팎으로 변화의 바람이 불어닥쳤다.

급격한 환경 변화를 동반한 21세기의 문이 열리면서 국내 제약산업은 기대와 우려가 교차했다. 하지만 지난 130여 년간 온갖 시련과 부침을 딛고 성장해온 제약산업이었다. 일제 치하에서 설립된 민족 제약회사들이 겪었던 불이익과 차별에 비하면 오히려 상황은 더 나아졌다.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당시에도 18곳의 제약사가 부도를 맞았지만 대대적인 구조조정을 통해 위기를 극복했다. 최근 코로나19 사태에서도 국내 제약사들의 활약은 빛을 발하고 있다. 국내 제약산업은 지난 20년의 시련과 도전, 성과를 자양분삼아 대한민국의 미래를 짊어질 주력 산업으로 발돋움할 준비를 하고 있다.

▲ 국산신약 개발 현황. 출처=한국제약바이오협회

선플라 → 엑스코프리

우리나라는 1999년 7월 신약개발국가 대열에 합류했다. 식품의약품안전청이 SK케미칼의 백금착체 항암제 ‘선플라 주’를 국산 신약 1호로 허가하면서다.

선플라의 등장은 국내 제약업계에 신약 개발 의욕을 고취시키는 계기로 작용했다. 선플라 이후 29개의 국산 신약이 추가로 개발됐다. 당시 선플라는 상업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지 못하면서 2009년 생산이 중단됐지만 해외에서 개발된 신약을 도입하거나 모방해 생산하던 국내 제약산업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는다.

국내를 넘어 미국 진출을 노리는 국산 신약도 등장했다. 2003년 4월 LG생명과학의 퀴놀론 계열 항균제 ‘팩티브’가 국내개발 신약 최초로 미국 식품의약국(FDA)의 허가를 취득했다. 팩티브의 FDA 승인으로 우리나라는 세계 10번째 신약 개발국으로 이름을 올렸다.

최근에는 SK의 100% 자회사인 SK바이오팜이 개발한 뇌전증 치료제 ‘엑스코프리’가 미국 시장에 공식 출시됐다. 엑스코프리는 지난해 11월 성인 대상 부분 발작 치료제로 FDA 시판 허가를 받았다. 팩티브 이후 5번째로 FDA 관문을 통과한 국산 신약이다. 다만 엑스코프리는 이전 신약들과 달리 혁신 신약으로 분류된다. 국내 제약사가 신약후보물질 발굴부터 임상 개발, 판매 허가 신청까지 모든 과정을 독자적으로 진행했다는 점에서 장족의 발전을 이뤘다.

▲지난해 8월 국회를 통과한 첨생법(첨단재생의료 및 첨단바이오의약품 안전 및 지원에 관한 법률)의 시행이 눈앞에 와 있다. 출처=국회 홈페이지

의약분업 → 첨단바이오법

진료와 조제가 분리되는 의약분업 제도가 2000년 7월 1일부터 처음 실시됐다. 의약분업에 따른 의료체계의 변화는 제약산업 환경에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처방권자인 의사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의약품 시장이 전문약 위주로 재편성됐다. 또 의약품 유통 투명화와 물류 합리화를 통한 비용 절감 등의 목소리가 힘을 얻으면서 유통 선진화를 촉진시키는 계기로 작용했다.

20년이 지난 현재 국내 제약업계는 의약분업 못지않은 새로운 변화를 앞두고 있다. 지난해 8월 국회에서 ‘첨단바이오법’이 통과되면서 바이오 신약 개발에 탄력이 붙을 것이란 기대감이 커지고 있다. 첨단바이오법의 핵심은 신약 개발 속도를 높이는 것이다. 바이오업계는 평균 10년 이상 걸리던 신약 개발 기간이 이 법이 시행되면 3, 4년가량 단축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희귀·난치병 환자에게 줄기세포 치료제를 임상연구 목적으로 시술하는 것도 가능해진다.

국내 제약산업은 R&D 역량 강화와 더불어 선진국 수준의 생산 및 품질관리 경쟁력 확보 등으로 글로벌 시장에 도전장을 내밀 수 있을 정도로 성장했다. 하지만 이 같은 성과도 정부의 정책적 뒷받침이 없다면 모두 수포로 돌아갈 수 있다. 국가적 차원의 전폭적인 지원과 관심이 요구된다.

▲ 최근 5년간 국내 제약산업 매출 증가율(2013 ~ 2017년).. 출처=한국제약바이오협회

한미 FTA → 기술수출

우리나라는 2004년 칠레와의 자유무역협정(FTA) 발효를 시작으로 글로벌 경제영토 확장을 본격화했다. 국가 간 FTA 체결로 시장이 확대되고 수출과 투자가 촉진된다는 기대감과 더불어 협정 대상국에 비해 경쟁력이 낮은 산업은 문을 닫아야 한다는 우려가 공존했다.

특히 미국과 유럽 등 제약산업 강국들과 맺은 FTA는 국내 제약산업에 글로벌 무한 경쟁 시대가 열렸음을 시사했다. 실제로 2007년 한·미 FTA 타결 이후 국내 제약산업에는 R&D 훈풍이 불기 시작했다. 기존 내수 중심 산업에서 벗어나 글로벌 무대로 진출해 살길을 모색해야 한다는 인식이 확산됐기 때문이다.

당시 FTA는 의약주권 논란과 함께 수많은 우려를 낳았지만 국내 제약사들이 신약 개발 역량을 키우고 해외 시장 진출을 위한 기회로 삼았다. 2015년 한미약품이 무려 5건의 기술수출 잭팟을 터뜨리면서 국산 신약의 위상을 드높였다.

지난해 제약·바이오 신약 기술 수출 실적은 13건으로 8조7673억원에 이른다. 이는 수출 11건을 기록한 전년(5조3706억원) 대비 약 63% 증가한 수치다. 국내 제약산업의 저력을 여실히 보여줬다는 평가다. 올해도 지속적인 R&D 투자로 신약 경쟁력을 높이는 국내 제약·바이오업계를 향한 기대감이 어느 때보다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