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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백의 돌출입과 인생] 낙장불입

‘내로남불’,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 어쩌다가 성어(成語)의 반열에 올랐는지 모르나, 여느 4자 성어도 처음 만들어진 때가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가령 유치원생 꼬마들이 로맨스와 불륜이 무슨 뜻이냐고 묻는다면, 설명하기가 대략난감(大略難堪)이다. 이 역시, 신조어다.

과거에는 새해가 되거나, 친지들이 모일 때 혹은 장례식장에서도 화투판이 벌어지곤 했다. 지금은 작고하신 모교 S대 의대 성형외과 스승님이 주임교수를 하실 때, 새해가 되면 의국원들이 교수님 댁에 모여 삼삼오오 둘러앉아 재미 삼아 카드나 화투판이 벌어졌다. 다정했던 추억을 뒤로하고 벌써 강산이 한두 번 바뀌었다.

요즘은 밤새 고스톱 치면서 장례식장의 상주 곁을 지켜주는 게 의리인 시대가 지났다. 아마 젊은이들은 고스톱이 뭔지도 모를 것이다. 낙장불입은 고스톱의 여러 가지 룰 중에 생기초다. 한번 바닥에 떨어진[落] 화투장[張]은 다시 내 손으로 되돌릴 수 없다[不入]는 뜻으로 만들어낸 우스개 4자 성어이다. 즉 이미 낸 카드, 이미 던진 주사위는 무효로 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필자의 지인 중 한 명은 몇 년째 아내와 말을 한마디도 안 하고 지낸다고 한다. 말을 하면 싸움이 되니, 서로 긁지 않고 지내기로 암묵적 합의를 한 모양이다. 차라리 헤어질 만도 한데, 아직 어린 자식 얼굴 봐서 그렇게 못한다고 한다.

'결혼은 골치아픈 거예요.' 역대 종편 드라마 중 최고 시청률을 경신했다는 드라마 <부부의 세계>에서 여의사로 나오는 배우 김희애의 대사다.

주말인 어느 봄날, 당신은 당신의 배우자나 연인에게 갑작스러운 1박 2일 여행을 제안한다.

배우자는 너무 갑자기 인데다 일요일 날 미용실도 예약되어 있어서 썩 내키지 않는다. 일단 어디 가자는 거냐고 묻는다. 동해에 가서 회도 먹고 바다 보고 오자고 한다. 그러자 상대방은, 동해는 너무 먼데다가 차도 많이 막힐 것 같다며 가지 말자고 한다. 기껏 깜짝 여행을 제안한 측에서는 돌아오는 반응이 부정적이니 속상하다. 열심히 설득해본다. 집에 있으면 답답하니 오랜만에 바람 쐬자, 회 맛있는 집 알아놨다, 운전 내가 다 할게... 결국 마지못해 배우자도 동의를 하고, 이렇게 출발을 한다.

배우자의 예상대로 차가 막힌다. 고속도로에서 가다 서다를 반복한다. 배가 고프다. 저녁에 바닷바람 맞으면서 회를 먹으려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갈 게 분명해졌다. 휴게소라도 빨리 도착해서 허기라도 채우면 좋을 지경이다. 마지못해 동의해줬던 배우자가 짜증을 낸다.

-이것 봐. 차막힐 거라고 했지. 내가 가지 말자고 했잖아.

-...

누구의 입장에 더 공감이 가시는지?

필자는, 이럴 때 “가지 말자고 했잖아”라고 말하는 건, 바로 그 낙장불입의 룰에 어긋난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가기로 오케이 했으면 그 결과도 공동책임 아닌가? 마음속에 여행을 같이 나서기 싫었던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겠지만, 그러자 하고 따라 나섰다면 한 편이 되어주어야 하는 것이 부부고 연인 사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경우를 대비해서, 미리 ‘여러 가지 상황이 생길 수 있음을 알고도 여행을 가는 것에 동의한다’고 싸인을 받아놓을 수는 없는 일이다.

얼마 전 제주의 한 핫한 식당을 찾았다. 야외 좌석과 실내가 트여 있어서, 실내에서 식사 중인 우리 테이블로도 쉴 새 없이 큰 나방과 날벌레, 기어다니는 벌레들이 번갈아 공세를 펼쳤다. 한쪽 벽에 유명 해충퇴치 업체의 해충박멸기가 붙어 있었지만 역부족이었다. 옆 테이블에서 서로에게 음식을 떠 먹여주던 다정한 커플이 급히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나 싶더니, 음식점 주인과 실랑이 중이었다. 음식에서 벌레가 나온 모양이다. 먹고 있던 음식으로 벌레가 기어서 혹은 날아서 들어간 것인지, 조리하는 중에 이미 벌레가 섞여 같이 조리되어 나온 것인지는 전후 사정을 알 수 없으나, 여하튼 서로 답답한 노릇이었을 것이다.

이런 경우를 대비해서, 미리 음식에서 벌레가 나온 경우 음식값은 어떻게 하고 배상은 어떻게 하는지 적은 동의서를 식사 전에 들이밀고 서명을 받겠다고 한다면, 일단 밥맛은 제대로 뚝 떨어질 것이다. 벌레의 크기나 종류에 따라 세부항목이 명시되었다면 더 엽기적이다.

세상에는 이런 일들이 더 많다. 장난감에 쓰여 있는 ‘이 장난감은 미끄러져서 다칠 수 있다’, 대중 사우나에 쓰여 있는 ‘따로 보관하지 않은 귀중품은 책임지지 않습니다’, 음식점의 ‘신발 도난은 책임지지 않습니다’, 헐리우드 커플들의 혼전 계약서, 모두 같은 맥락이다. 미리 책임의 범위와 한계를 명시하겠다는 것이다.

옛날엔 큰 병 걸리면 태반은 죽는 게 당연하지만 용한 의사 덕에 운 좋게 살게 되면 의사에게 큰절하는 시절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의학이 발전되면서 오히려 의사의 부담이 증가한 면이 있다. 아무리 의학이 발전해도 의사는 신이 아니다. 병을 이겨내도록 돕는 사람일 뿐이다. 그런데 요즘은 큰 병이 걸렸을 때 의사가 그 병을 낫게 하는 건 병원비를 낸 의료소비자의 당연한 권리이고, 그 병을 낫게 하지 못하거나 그 병의 치료과정에서 후유증이라도 생기면 책임을 물을 태세다. 한의학을 전공한 한의사가 봉침[벌침] 시술을 하다가 환자에게 벌독 쇼크가 온 상황에서, 그 한의사로부터 급히 도움을 요청받은 이웃 가정의학과 의사가 달려와 심폐소생술을 했으나 환자는 결국 사망한 안타까운 사건이 있었다. 한의사가 소송을 당한 것과 동시에, 죄없이 달려와 환자 살려보겠다고 심폐소생술을 한 가정의학과 의사도 수 억원대의 배상 소송에 휘말렸다. 안타까운 현실이다.

* * *

아프지도 않은 환자, 미용적으로 개선되고 싶은 환자가 오는 곳이 성형외과다.

게다가 성형외과는, 완치라는 개념도 아주 다르다. 이를테면 암 덩어리를 몸에서 떼어내고, 5년 이상 생존하면 보통 완치라고 한다. 생명을 건진 그런 환자의 배나 가슴에 남은 흉터살 같은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성형외과에서의 완치는 아름다움에 대한 만족의 개념이므로 사실 다분히 주관적일 수 있다.

돌출입수술 전, 환자에게 수술의 효과뿐만 아니라 합병증의 가능성까지 비교적 상세한 설명을 해주고 환자도 이에 동의한 후 수술을 하게 되지만, 정작 필자를 믿는 환자들이 원하는 것은 부작용이 없는 수술을 넘어 결과가 만족스러운 수술이다. 따라서, 환자가 원하는 것을 정확히 파악하고 그것을 구현해주어야 한다. 의사 취향대로만 수술해서도 안 된다. 성형수술은 정교하고 섬세한 진검승부다. 안전은 기본이다.

그녀가 필자를 처음 찾은 것은 3년 전이었다.

필자에게 돌출입 수술을 받을 뻔했던 그 환자는 그 당시 다른 선택을 했다. 모 병원에서 양악수술을 받은 것이다. 결국 이번에 다시 필자를 찾아온 그녀는 우울했다. 인중부위가 여전히 돌출입이었고 턱끝은 어색했다. 3년 전의 단 한번의 선택은 그야말로 낙장불입이 되어, 되돌릴 수 없는 결과를 자신의 얼굴에 지니고 살게 된 것이다.

물론, 양악수술이 나쁜 수술은 아니다. 소위 주걱턱, 즉 하악전돌증처럼 꼭 양악수술이 필요한 환자가 있다. 그런데 만약 어떤 돌출입이 돌출입수술[전방분절절골술]로도, 양악수술로도 치료가 가능하다면, 필자는 주저없이 전자를 택할 것이다. 상대적으로 더 안전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환자에게 더 편하고 유리하다.

필자에게 다시 찾아온 환자가 어여쁘기도 했고, 얄밉기도 했다.

용기 내서 날 다시 찾아온 신뢰는 고마웠지만, 당시 내 말 안 듣고 양악수술 한 건 좀 미웠다. 양악수술 결과 역시 미웠다. 불행 중 다행이라면 발치를 하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이제라도 돌출입수술이 가능했다.

환자는 수술날짜를 잡고 돌아갔지만, 실장에게 하루에도 열두 번씩 생각이 왔다 갔다 한다는 메시지가 왔다. 누구나 인생에서 단 한 번만 있어야 할 큰일을 앞두고 마음이 혼란스러운 것이 인지상정이다. 그게 실수를 줄일 수 있도록 만들어진 인간의 자연스러운 방어기제일 것이다. 필자에겐 마음만 먹으면 삼십 분 대에도 끝낼 수 있(지만 미적 완성도를 위해 그렇게 하지 않고 있)는 돌출입수술이 전혀 큰 수술이 아니지만, 환자에게는 일생일대의 결단일 것이고, 눈, 코수술에 비해 더 무겁게 느껴질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환자는 돌출입수술보다 상대적으로 힘들었을 양악수술을 이미 한번 겪었으니, 또 돌출입수술로 얼굴뼈를 건드려야 하는지 회의가 들만도 하다. 주위에서도 만류한다고 한다.

고민하던 환자가 돌출입수술을 며칠 앞두고 필자를 한 번 더 찾았다.

불안한 마음에 한 번 더 집도의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심정을 충분히 이해한다.

환자의 수술 결정은 낙장불입이 아니다. 환자의 자유로운 의지로 선택할 수도 취소할 수도 있다. 단, 돌출입수술을 고민하거나 주저하다가, 더 저렴한, 혹은 더 고가의 부적절한 선택을 해서 얼굴을 망치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모든 얼굴은 소중하고 최선의 수술을 받을 가치가 있다. 환자가 필자에게 다시 다녀간 후 실장에게, 마음이 한결 편해져 감사드린다는 메시지가 왔다고 한다.

돌출입수술, 광대뼈, 사각턱수술 등을 통해 환자가 빛나고 아름다워지는 것은, 환자뿐만 아니라 수술을 집도한 필자에게도 기쁘고 감사한 일이다.

3년 전 서로에게 고마운 존재, 고마운 수술이 될 수 있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이제, 그녀가 잘못 내버린 카드를, 아쉽게 비껴간 인연을 되돌릴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른 것이다.

한상백 서울제일성형외과 원장  |  expert@econovill.com  |  승인 2020.05.18  09:3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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