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4월 노동통계국의 휘발유 물가지수는 20.6% 급락하면서 미국인들은 주유소에서 유가 하락을 직접 실감하고 있다. 전체 에너지 지수는 10.1% 하락했다.     출처= Global News

[이코노믹리뷰=홍석윤 기자]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한 지역 봉쇄가 상당 기간 지속되고 이에 따라 사람들이 소비가 줄면서 미국의 물가 폭락세가 심상치 않다고 월스트리트저널(WSJ) 등이 12일(현지시간) 보도했다.

12일 발표된 노동통계국의 자료에 따르면, 미국의 소비자물가가 4월에도 하락세를 보이면서 미국소비자 물가는 두 달 연속 하락했다. 계절조정 기준으로 4월 물가는 0.8% 하락해 2008년 12월 이후 가장 큰 하락폭을 기록했다.

이번 물가 하락은 휘발유와 에너지 가격 하락에 의해 주도되었지만, 가격 변동성이 심한 식품과 에너지를 제외해도 물가 하락폭은 0.4%을 기록했다. 이는 노동통계국이 1957년 이 데이터를 추적하기 시작한 이래 소위 근원 소비자물가지수(core consumer price index, 식품과 에너지를 제외한 물가지수) 월간 기준으로 가장 큰 하락폭이다.

물가 하락은 소비자들에게 좋은 것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경제학자들은 인플레이션의 반대 개념인 디플레이션 역시 매우 나쁜 소식이라는데 의견이 일치한다.

특히 사람들이 물건을 사지 않기 때문에 물가가 하락하는 경우, 제조업체들은 그들이 파는 제품을 만들기 위한 비용조차도 충분히 벌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한다. 그것은 결국 제품 생산을 중단하고 근로자들을 해고할 것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게 되면 일자리를 잃는 사람이 많아지고 수요가 계속 줄어드는 악순환이 반복될 수 있기 때문이다.

다행히 아직 디플레이션은 일어나지 않고 있다. 지난 12개월 동안 물가 상승률은 0.3%를 기록했다. 그러나 미국의 재택 격리 명령이 더 지속돼 경제가 대규모 침체에 빠지게 되면 낮은 물가는 피해를 더 악화시킬 수 있다.

끔찍한 유가 폭락

최근의 국제 유가 폭락은, 코로나로 인한 글로벌 수요 위기가 발생한 부적절한 시기에 사우디와 러시아간의 가격 전쟁이 발발하면서 야기되었다.

사람들이 여행 계획을 취소하고 집에서 일하거나 심지어는 일자리를 잃으면서, 석유 시장은 수요 감소에 빠졌다. 그러나 석유회사들은 여전히 생산을 멈추지 않았고, 이로 인한 공급 과잉으로 석유를 비축할 수 있는 용량이 한정되면서 지난 달 석유 선물 가격이 마이너스까지 떨어지는 상황이 발생했다.

지난 4월 노동통계국의 휘발유 물가지수는 20.6% 급락하면서 미국인들은 주유소에서 유가 하락을 직접 실감하고 있다. 전체 에너지 지수는 10.1% 하락했다.

▲ 가격 변동성이 심한 식품과 에너지를 제외한 근원 소비자물가지수도 0.4% 하락하며 1957년 이 데이터를 추적하기 시작한 이래 월간 기준으로 가장 큰 하락폭을 기록했다.    출처= Consumer Price

옷, 자동차, 항공료도 줄줄이 하락

이번 물가 하락이 에너지 부문에서 주도되긴 했지만 물가가 하락한 부문은 에너지 부문만이 아니었다. 장기간 지속된 재택 격리로 의류, 자동차 보험, 항공료 등과 같은 제품과 서비스의 수요가 사라지면서 전반적인 물가 지수를 끌어내렸다.

대부분의 미국인들이 봉쇄령으로 인한 제한에 영향을 받으면서 휴가를 위한 지출이나 생필품 이외의 소비 지출이 크게 줄어들었다. 경제학자들은 봉쇄령이 풀린 이후에도 소비자들이 신중한 자세가 쉽게 없어지지 않을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에 이런 종류의 지출이 회복되려면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우려한다.

식료품과 월세는 올라

반면 식료품 가격은 더 상승했다. 홈 카테고리에서 식료품은 1974년 2월 이후 가장 큰 폭의 상승률을 기록했다. 특히 계란의 가격 지수는 16% 이상 상승하며 식품 품목 중 가장 큰 상승폭을 기록했다. 임대료와 의료비도 소폭 상승했다.

경제학자들은 코로나바이러스 사태가 대규모 디플레이션 효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예상했다. 4월 데이터가 그런 예측을 입증했다. 그러나 연이은 물가 하락은, 미국 경제에서 가장 이상적인 상황으로 간주되는 인플레이션 2% 유지를 목표로 하고 있는 연방준비제도의 정책 입안자들에게는 나쁜 소식이다.

캐나다 BMO은행의 살 과티에리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코로나가 진정돼 경기가 다시 살아나더라도 내년까지는 높은 실업률과 낮은 원자재 가격에 직면해 근원 물가상승률은 1%를 넘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연준이 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시장을 안정시키고 경제를 돕기 위한 거대한 통화 부양책을 내놓았다. 그 정도의 통화 정책은 인플레이션을 유발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옥스퍼드 이코노믹스의 수석 경제학자 그레고리 다코는 “아마도 인플레이션의 상승은 거의 일어날 가능성이 없어 보인다”고 말했다.

얼어붙은 소비 심리

문제는 얼어붙은 소비 심리가 쉽게 회복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최근 미국 경제분석국(BEA)은 미국 국민들의 저축률이 지난 2월 8%에서 3월 13.1%로 급증했다고 밝혔다. 레이건 대통령 재임 시기였던 1981년 11월 이후 가장 높다. 4월 통계치는 더 높을 것으로 전망된다.

소비 심리를 가장 잘 나타내는 지표 중 하나인 신용카드 사용량도 큰 폭으로 감소했다. 비자카드에 따르면 지난달 28일까지 신용카드 결제액은 전년 동기 대비 31% 급감했다.

회계법인 RSM의 조 브루수엘라 수석이코노미스트는 “불황에 대비해 미국 내 소비자들은 소비 대신 현금을 쌓아 두려 할 것”이라며 “정책 입안자들이 말하는 것보다 소비자들은 훨씬 더 긴 경기침체를 대비하고 있다는 신호”라고 분석했다.

경제의 3분의 2 이상을 민간소비에 의존하고 있는 미국의 현실을 감안하면 미국인들의 소비 감소가 실물경제를 전반적으로 무너뜨리는 상황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