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실력은 어느 정도라고 생각하십니까?

위 질문을 던지면, 상대방은 무의식적으로 같은 회사 또는 업계에서 일하는 사람들과 나의 일하는 모습부터 실제 결과까지 모두 알지 못하는데도 불구하고 ‘무리한 비교’를 하게 된다. 그리고 스스로 생각할 때 가장 일을 잘한다고 생각하는 이의 이미지를 떠올리고, 무심코 이런 말을 뱉는다.

“저는 그렇게 실력이 좋지 않아요. 그렇게 잘하는 것이 있다고 말할 수 없거든요.”

열이면 그 중에 아홉은 위와 같은 류의 답을 한다. 어려서부터 타인 앞에서는 겸손해야 한다고 배워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진짜 내 실력이 부족하다고 느끼는 명확한 지점이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어 재차 이어서 질문한다.

 

“그럼, 어떤 부분에 대해 실력이 부족하다고 느껴지시나요?”

그럼, 내가 가지고 있는 어떤 ‘약점’에 대해서 묻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약점’에 대해 특별히 심각하게 정리해본 적이 없다. 그저 누군가 나에게 무심코 던진 “OO님은 어떤 부분이 약한 것 같아요.” 같은 말을 그대로 복사 붙어넣기 하거나 무엇이 답인지 알 수 없는 모호한 답변으로 일관한다.

“딱히 어떤 부분이 부족하다고 말하지는 못하지만, 그냥 전체적으로 부족하다고 느껴요.”

여기서 더 인터뷰는 이어질 수 없다.

어떤 부분이 부족한지, 그 판단을 만든 기준이 무엇인지, 그 기준이 얼마나 논리적 원리에 의해 선정되었는지 등에 대해 심사숙고 해 본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냥 ‘부족하다는 느낌’이 스스로를 괴롭히는 것으로 결론이 난다.

여기까지 읽었으면 이 칼럼의 메시지가 제목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 우리는 부정할 수 없는 확고한 논리적 기준에 의해 우리를 평가하지 못한다. 그저 느낌상 어딘가 모자라고 부족해 보인다고 느낄 뿐이다. 그 느낌이 오래도록 갖게 되면, 신념으로 자리잡게 되고, 그걸로 그 사람의 회복 불가능한 자존감의 사이즈는 결정된다.

언젠가 강연에서 누군가 질문한 적이 있다.

 

“강사님은 어딘가 당당해 보이는데,그 이유가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이 질문에 나는 이렇게 답했다.

저는 기본적으로 남의 말에 귀 기울여 듣지 않습니다. 의심도 많고, 생각보다 집중력도 ‘꽝’이라 서요. 책도 잘 보지 않고, 누군가 쓴 글에도 큰 의미를 담아서 보지 않습니다. 그냥 “아 이런 게 있구나. 또는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구나” 정도의 반응을 담습니다.

대신에 최대한 많은 것을 보려고 합니다. 원래 집중력이 좋지 못하기 때문에, 흘겨 보고 듣고 하는 것의 ‘양’을 늘려가는 것이죠. 그래서 언뜻 대충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서 내 생각에 도움이 되는 것을 발견하고 기억하려 애씁니다. 외우기 보다는 그 논리가 어떤 맥락을 지녔는지 되새기는데 주력하는 것이죠.

그리고 제 스스로 한 무언가에 대해 섣불리 평가하지 않습니다. 되든 안되는 ‘해보는 것’에 의미를 두고 죽었다 깨나도 안되는 것이라고 판단했을 경우에는 뒤도 보지 않고 내려놓습니다. 아무리 축구를 열심히 한다고 해도 제가 손흥민 박지성이 될 수 없는 것처럼 나에게 조금 더 의미가 있고 중요한 것에 집중하기 위해 관계성이 적은 것에 들이는 노력을 점차 최소화 하는 것이죠.

그리고 지금 이 자리에서 하는 강연과 글 쓰는 것 등 제 전문 분야와 관련된 것에 대해서는 꾸준히 연구하여 내공을 쌓으려고 합니다. 언제 어느 자리에서든 당당하게 제 이야기를 할 수 있도록 말이죠.

정리하면 저는 제 신조를 믿습니다. ‘아님 말고’ 안되면 안하면 됩니다. 그게 마음에 제일 편하죠. 그리고 남들과 비교하지 않습니다. 원래 사람은 물리적으로 비교가 불가한 동물입니다. 워낙 고등해서 비교한다고 해도 원하는 답을 얻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냥 ‘그런 경향 또는 성향’이 있다 정도로 해석 가능합니다. ‘논리적 과학적 접근 방식’을 통해 비논리적 해석을 하면 엉뚱한 답이 나와 나를 괴롭히거든요. 

우리 스스로 받는 스트레스의 대부분은 나 자신으로부터 온다. 이때, 이를 판별하는 기준은 처음부터 우리 자신에게 있던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나도 모르게 학습되어 갖게 되는 일종의 자격지심 같은 것이다.

자격지심 정도에서 그치면 다행이다. 마음의 아킬레스건으로 자리잡아, 누군가 건드리면폭발하는 트리거가 되면 곤란하다. 그 폭발이 겉이 아니라, 속으로 분노하게 되면 화의 대상은 또 ‘나 자신’이 된다. 과연 이런 생각의 루틴이 나의 성장에 어떤 긍정적 영향을 미친다고 볼 수 있는가.

그렇다면 과감히 내려놔야 한다. 비교하는 나 스스로를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 비교하고 싶다면 나의 과거와 비교해보자.

요즘 6년 동안 끊었던 웨이트 운동을 매일 30분 이상씩 하면서 한참 10년전에 열심히 했던 당시의 감과 비교하고 있다. 그러나 그 감이 정확하지 않다. 당시에 들었던 무게는 지금 들지 못한다. 그 이전으로 돌아가 다시 시작했던 때와 비교하면, 지금은 그저 ‘다치지 않기 위해 어떤 무게와 자세가 나에게 필요한지 금새 자리를 잡을 수 있는 정도’다.

과연 비교하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 전혀 없다. 따라서 저처럼 하지 마시라. 명확하게 나의 발전을 위해 할 수 있도록 지금의 객관적 상태를 측정 가능한 기준부터 우선 만들어야 한다. 감이나 느낌에 의존한 것 말고 말이다.

그래서 운동하며 기록을 측정 중이다. ‘노 젓기’ 운동을 주로 하고 있는데 매일 같은 무게로 같은 시간대에 몇 번 노를 저을 수 있는지 매일 측정 중이다. 컨디션이 좋을 때는 10분에 400회 정도, 좋지 못할 때는 350회 전후를 기록한다. 그렇다면, 지금의 목표는 컨디션에 관계없이 평균 400회 이상하는 것으로 잡았다.

그리고 그냥 하는 것이다. 될 때까지 말이다. 목표를 달성하지 못해도 관계없다. 운동을 하는 것의 가치와 의미는 해당 기록을 달성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건강을 지키고, 체력을 높여 더욱 단단한 몸을 가지는 것이다. 여기서 기록은 그저 거드는 수단이다.

평가를 하려면 제대로 해야한다. 이렇게 말이다. 위와 같이 명확한 목적과 목표를 통해 지속 가능함을 미리 마련한 상태에서 하는 중장기적 입자의 ‘중간점검’ 차원에서 하는 객관적 평가 이외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 아무 의미 없는 것을 나에게 시전하며 스스로 자존감을 갉아먹는 짓 좀 그만 하자. 왜 바보임을 셀프 인증하는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