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 노래나 트는데 왜 이 노래만 나오지?’

솔직히 얘기하자면 불과 얼마 전까지 ‘아무 노래’라는 곡이 있을 거라곤 상상을 못했다. 어쩌다 TV에서 ‘아무 노래 챌린지’ 같은 얘기들이 나오는데 이상하게도 아무 노래나 틀지 않고 꼭 귀에 익숙했던 그 곡에 맞춰 춤을 춰댔다. 물론 그런 춤이 있는지도 몰랐다. 사실 난 그 챌린지가 정말 예상치 못한 아무 노래나 틀어 놓고 즉흥적으로 춤추는 대회인 줄로만 생각했다.

알고 보니 ‘아무 노래’는 아무렇게나 만들어진 노래가 아니었다. SNS 조회만 해도 수 억뷰를 돌파했고, 방송 출연 없이도 지상파 3사의 음악방송 1위를 쟁취했다. 아마도 가수 본인도 그렇게 예상하지 못했을 수도 있었겠지만 어느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초대형 성공이었다. 단 한 곡으로 말이다. 가수의 얘기를 들어보니 이번에는 창작의 고통을 피하기 위해 최대한 단순하게 작업할 생각으로 초기에 들었던 생각대로 밀어 부쳐 완성했다고 한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래의 완성도, 곡 발표 시기 그리고 운이라는 삼박자가 맞아떨어졌고, 결과적으로는 메가 히트를 불러왔다.

직장생활 해본 사람은 알겠지만, 사실 ‘아무’라는 말이 붙어 있는 것이 제일 어려운 일이다. 오죽했으면 점심 시간에 ‘아무 거나 먹자’는 말을 팀 막내가 제일 싫어하겠는가? 바쁜 팀장이나 선임들이야 가볍게 ‘아무 거나’라고 툭 던질 수 있지만, 당하는 막내는 세상 고민을 혼자 떠안은 것처럼 고민에 또 고민을 거듭해야 한다. 사실 짜장면과 짬뽕이나 김치찌개와 된장찌개처럼 선택이 어려운 것도 없고, 선택과 동시에 후회하게 되는 것도 드물다.

 

아무 말은 그냥 할 수 있지만, 해명에는 엄청난 수고로움이

조직 그리고 사람들은 절대로 아무 거나 원하지 않으면서도 ‘아무 거나’를 말한다. 생각의 한계에 봉착할 때면 늘 머리 속으로는 최상의 어떤 것을 떠올리면서, 입으로는 최하의 범주를 ‘아무거나’로 포장해서 던진다. 회의시간에 아무거나 얘기해 보라고 해서 정말로 ‘아무 말’이나 했다가 엄청난 불호령을 들었던 경험은 누구나 한번쯤은 있을 것이다. 간단히 한 두 가지 결정하고 마치게 되어 있는 회의가 산으로 가서 직원들의 태도 열정이니 하면서 캐캐묵은 감정의 지꺼기들이 덕지덕지 붙은 온갖 말의 스트레스를 불러오기도 한다. 생각 없는 아무 말 한 마디가 전진이 아니라 후퇴도 한참을 후퇴하게 만들어버린다. 그런 상황에는 옵션이 붙기 마련이다. 그런 말 하는 사람의 기호에 맞춘 답 말이다.

코로나 사태를 맞이한 지 석 달 열흘도 훨씬 넘어가고 있다. 아직도 긴장을 늦추지 말라는 정부와 질본이지만, 사람들의 공포는 확실히 이전보다는 훨씬 줄어들었다. 장기화 되는 이 시기에 여전히 현장을 떠나지 못하고 땀 흘리고 있는 의료진에게 감사의 수어 인사를 보내는 ‘덕분에 캠페인’도 진행 중이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다. 어디엔가 숨겨둔 확진자들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지난 총선 시기에는 지금보다 의심의 강도가 훨씬 높게 제기됐다.

당시 정부가 4.15 총선을 앞두고 방역 성과를 강조하기 위해 검사에 소극적으로 나선다는 주장을 강하게 제기하고 나선 사람들이 있었다. 사실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문제를 불러일으키기 위해서 아무 말이나 던지고 보는 것이나 다르지 않았다. 일평균 검사량이 4월 첫째 주 9,584건에서, 둘째 주에는 7,627건으로 감소했고, 13일께에는 4.122건으로 계속 감소하고 있는 이유는 검사를 적게 했다기보다는 신고되는 의심환자 수가 줄어들었기 때문이었다.

결론은 매일 공개되는 수치보다 코로나 검사를 더 많이 해왔지만, 통계상의 검사 건수는 의심환자로 신고된 사람들에 대한 검사만 집계된 것이고, 실제로는 그보다 35만 여 건 정도가 더 많았다. 접촉자들에 대한 일제검사. 요양시설 같은 시설에 대한 전체 진단검사나 해외 입국자들에 대한 전수검사 그리고 격리해제 전 재검사 같은 것은 통계에서 제외가 되기 때문에 실제로는 통계에서 발표되는 것 보다 훨씬 더 많은 검사가 이뤄지고 있었다. 하지만 누군가가 엉뚱한 소리로 제기한 문제는 그냥 두고 넘어갈 수가 없었기에 각종의 분석자료, 데이터 등을 동원해서 설명하고 해명해야 했다.

‘아무 말’은 아무 때나 아무렇게나 던질 수 있지만, 거기에 대한 해명은 철저한 근거와 자료를 바탕으로 설명되어야 한다. 아무 말을 하는 데에는 아무런 수고가 필요 없지만, 이를 해명하기 위해서는 말로 표현할 수도 없는 엄청난 노력이 들어간다. 그것이 조직의 발전을 불러오는 경우라면 열 번 스무 번도 감수할 수 있겠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별 생각없이 던진 말의 결과로 조직력이 낭비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많은 사람들이 차라리 그 시간에 쉬거나 좀 더 생산적인 일을 하는 것이 조직의 발전을 위한 길이라는 것을 잘 알지만, 일단 제기된 ‘아무 말’이 비록 헛소리에 불과할지라도 검증은 하고 넘어갈 수 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알면 함부로 행동하지도 말도 못해!

당산역에 가면 재미난 문구의 그림이 하나 벽에 붙어있다. 위치는 9호선 승강장으로 내려가는 에스컬레이터 초입 벽면이다.

‘지금 들어오는 저 열차!! 여기서 뛰어도 못 탑니다. 제가 해봤어요.’

1분 1초가 급한 아침 출근길, 승강장에 들어서자마자 전철이 들어오는 것과 몇 분을 기다리는 마음은 하늘과 땅 차이다. 계단을 내려가려는 데 ‘때르르릉’하는 소리와 함께 열차가 들어오고 있다. 급한 마음에 에스컬레이터나 계단을 두 세 개씩 뛰어 내려가 보지만 번번이 눈 앞에서 전철은 떠나고 있다. 그 뿐이랴 그렇게 다이빙 승차라도 하기 위해 계단에서 에스컬레이터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넘어지고 자빠졌을까, 자기만 다치면 괜찮지만 자칫하다간 비몽사몽 출근길 사람들을 덮쳐 대형사고로 이어지기 십상이다.

그런데 이 간단한 문구 하나가 여럿 사고 나고 다치는 것을 막아준다. 핵심은 직접 해보고 쓴 것이기 때문에 의심하지 말라는 것이다. 열차가 들어오는 소리에 나도 모르게 급한 마음이 들다가도, 이 그림을 보게 되는 순간 깨끗이 단념하게 된다. 그 언저리에서는 ‘때르르릉’ 소리가 들려도 ‘다음 열차를 타겠다’는 마음을 먹게 된다. 지하철에 사람을 덜 태우기 위해서 써놓은 말이 아님은 누구나 알 것이다. 이 작은 그림 하나가 그 동안 일어났던 계단과 에스컬레이터에서의 수 많은 사고를 막고 있다.

탈무드의 명언들 중에서 사람의 입을 지적한 것이 꽤 많다. 그렇게 아주아주 오래 전부터 아무 말이나 함부로 하지 말라고 지적해왔지만 아직도 제대로 되지 않는다. ‘자신보다 현명한 사람 앞에서는 침묵하라’거나 ‘한 닢의 동전이 들어있는 항아리는 요란스러운 소리를 내지만, 동전이 가득 찬 항아리는 조용하다.’ 그리고 ‘물고기가 입으로 낚싯바늘을 물어 잡히 듯 인간 또한 언제나 그 입이 문제다’고 전하고 있다.

코로나가 아무리 맹위를 떨치는 위기의 상황에서도 분명 승승장구 발전하는 조직들이 있다. 위기가 오히려 기회가 되어 고도의 성장 시기가 되는 것인데, 부러울 뿐이다. 하지만 우리 주위에는 남의 성공이나 발전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우리도 그렇게 되고 싶은 소망’에 아무렇게나 말을 하는 사람이 꼭 있다. 예를 들자면 이 글을 쓰고 있는 5월 초 현재 코로나19와 관련하여 일일 국내 지역감염자 제로가 무려 세번이나 나왔다. 무척이나 천만다행이고 상황을 이렇게 관리해온 관계자들에게 무한히 감사하며 국뽕이 차 오른다. 이런 우리나라를 두고, 미국, 프랑스, 일본 같은 선진국에서 “왜, 한국 같이 못하냐?”고 자신들의 정부에 질책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들은 우리나라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피땀 흘린 결과물인지 잘 모를 것이다. 정부기관에서부터 기업, 의료관계자, 자원봉사자는 물론이고 모든 국민들이 서로를 지켜주고자 하는 한 마음에서 얼마나 노력해 왔는지는 아마 상상도 못할 것이다. 그래서 함부로 말을 하는 것이다.

불황에 불경기에 코로나 위기까지 더해져서 2020년 봄 이후는 앞이 보이지 않는 상황이다. 눈과 귀가 있는 성인이라면 말하지 않아도 위기감이 뼛속까지 스며드는 시기다. 남들이 거둔 성과와 성공이 부러워 ‘우리도 그렇게’라는 식의 말을 서슴지 않는다. 정작 우리의 처지와 상황은 도외시한 체 말이다. 결론은 아무렇게나 내뱉는 말에 다름 없다. 조직 아래로부터의 아무 말은 그냥 무시하면 된다. 하지만 위로부터 내려오는 아무 말에는 참으로 답이 없다.

지금은 아무 과자에 지나지 않지만, 한 때 ‘허니버터칩’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편의점에서 줄을 서서 구할 때가 있었다. 단순히 인기라는 말을 뛰어 넘어 광풍을 몰고왔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땐 왜 그랬을까 하는 생각이지만, 그땐 그랬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자신이 만들어 파는 제품이나 상품이 그렇게 광풍의 대상이 되어 대박이 되는 것을 꿈꾸지 않는 샐러리맨이 있을까마는, 심지어 내가 근무하던 조직의 경영진들도 그것이 부럽긴 했던 모양이었다. 어느 날 조회시간을 빌어 장황하게 말을 하면서 임직원들의 창의력이 부족하고 열정이 약하다고 몇 번을 강조했다.

그런 커뮤니티도 만들지 못하고 셀럽들을 불러모으지도 못한 것은 잘못이라고 말이다. 결과는 신뢰만 무너졌다. 당시 회사는 자동차부품과 제약사에 바이오제재를 공급하는 비투비 기업이었기 때문에 일반 소비자들과는 접점조차 없었다. 우리가 아무리 아무 노래나 만들어서 아무렇지 않게 불러 댄다고 ‘아무 노래’처럼 메가 히트를 불러올 수는 없다. 그렇게 허비되는 조직력만 모아도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만들 수 있는데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