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렵게 생각하지 마시라. 제발!

경륜이 있는 사람과 가끔 술잔을 나눌 수 있는 기회가 있어서 늘 감사하게 생각한다. 나누는 대화의 7-8할 정도가 나를 꾸짖는 내용이지만, 간간히 섬광처럼 번쩍이는 한 두 마디는 엄청난 소득이 된다. 조직 생활 하면서 느끼는 염증과 불만에 생각지도 않았던 질책이 가해질 때면 ‘아, 갑(甲)들은 이렇게 생각하는구나’ 라고 느낄 때가 많다. 서로 처한 현실이 다르고 바라보는 관점이 다르기에 생각이 이렇게도 다를 수가 있구나 하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쌓아온 연륜은 무시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하루는 바쁜 하루 일정을 보내고 저녁 식사와 함께한 술자리에서 이런 저런 대화를 이어가고 있었다. 환갑이 지난 지도 한참이라 이제는 귀찮은 일은 손을 떼고 좀 쉬고 싶다는 말을 하면서도, 빠져 나올 수 없는 일정 탓에 힘들다는 작은 불평이 이어졌다. 심심할 틈도 없이 여기 저기서 찾아오고 연락을 해 대는 통에 전화기를 없애버려야겠다고 투정을 부리기도 했는데, 그런 모습이 오히려 내게는 부러움 그 자체였다.

“아이참 오늘은 두 시간 반 동안 본부장한테서 업무보고를 받았다니까?”

“얼마나 좋아요. 열심히 했으니 보고하고 싶어 그러는 거죠.”

“그냥 몇 마디면 되지, 뭘 시시콜콜 두 시간 반이나 날 붙잡아 놓고.”

“허허, 늘 바쁘시니까 한번 날을 잡으신 모양이네요. 그래서 뭐라 말씀하셨어요?”

“난 다른 말 하지 않아. 딱 두 마디면 돼!”

대화가 거기까지 이르자 나도 모르게 침을 꼴딱 삼키게 되면서 집중했다. 오랜 경험을 가진 경영자의 핵심을 들을 수 있는 귀한 수업시간이기 때문이었다. 책에서도 배울 수 없는 귀한 교훈을 얻는다는 기대감이었다. 그 마지막 멘트는 “믿는다. 하던 대로 해” 였다. 그 말을 듣던 그 순간 잠시 멍했다. 당연히 나는 속으로 ‘보고 내용 꼬치꼬치 캐 묻고 확인하고, ………….’ 이런 것들을 생각하던 참이었다. 그 분은 평소 깐깐하기로 소문난 분이었기에 내 생각이 너무나 당연하다고 여기고 있었기에 더 했다.

 

“믿는다는 말 외에 해줄 말이 뭐가 있어?”

갑자기 울컥하는 느낌이 들었다. 미처 거기까지는 생각지도 못하고 있었지만, ‘내가 그토록 바라고 원하던 그 말’이었다. “역시, 대단하십니다”며 맞장구를 치고 있었지만, 그런 보스를 두고 있는 그 본부장이 너무 부러웠다. 가끔 나와의 사적인 대화에서 이런 저런 얘기를 많이 들어왔기에 그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해서는 짐작은 해왔지만, 정확히 서로 어떤 마음을 가지고 대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딱 그 두 마디에서 였다.

“회장님, 보통 월급쟁이들이 돈이나 승진 등등 많은 걸 바라는 것 같지만, 진짜 바라는 것은 방금 하신 말씀 딱 그 두 마디입니다.” 대화를 애써 이어가기 위해서 괜한 말을 또 쏟아내는 잔망스런 나의 주책이 이어졌다. 그리고 또 주책스럽게 분위기 깨는 대화를 한 마디 더 던졌다. “회장님은 본부장을 진짜로 신뢰하는 가 봅니다.” 괜스레 진의를 한번 더 파악 하고픈 심정에서 였다. 이래서 글 쓰고 책 쓰는 사람은 안 된다.

 

“내가 걔한테 해줄 수 있는 말이 뭐가 있겠어? 그 말 밖엔.”

사실은 이 말이 더 감동이었다. 굳이 의인물용 용인물의 (擬人勿用 用人勿疑) 같이 번드르르 한 말로 포장하지 않고, ‘믿는다. 하던 대로 해’ 그리고 ‘난 이 말 밖에 해 줄 말이 없어’라는 단호박 같은 말과 모습이 훨씬 강력하게 각인되었다. 사실 되짚어 생각해보면 이 두 마디에 여러 의미가 있을 수도 있다. ‘믿고 있으니 열심히 해’, ‘믿을 테니 열심히 해’, 또는 ‘믿고 싶으니 열심히 해.’ 그런데 이 말을 한 분은 이런 모든 뜻을 담은 것은 아닐까 싶다. 그리고 정작 중요한 것은 이렇게 들은 사람은 그 일에 열정을 바치지 않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게 어떤 조직이든 말이다.

얼마 전 집에서 TV 리모컨을 망가뜨린 적이 있었다. 총선에 코로나에 글로벌 정세까지 최근처럼 뉴스가 기다려진 적도 드물었다. 같은 이슈라 하더라도 방송사들마다 보도하는 관점이 달라서, 뉴스를 챙겨보는 방송사가 몇 되지도 않기 때문에 그 시간이면 늘 그 채널로 맞춘다. 그날도 뉴스를 챙겨 보던 중에 마침 식사시간이 되었다. 그런데 리모컨을 들고 가다가, 어째 손가락에서 미끄러져서 식탁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리모컨 윗부분이 살짝 벌어지면서 사이드에 있는 볼륨조절 키와 다른 키 하나가 마치 내장이 튀어 나온 것처럼 툭 튀어 나왔다.

지역 케이블사에서 셋톱박스와 함께 준 리모컨이라 망가지면 물어내야 하기도 하지만, 문제는 당장에 TV 보기가 영 껄끄러워 지는 것이었다. 리모컨 키들이 죄다 먹통이 되었다. 거기다 뭐가 문제인지 평소에는 말 잘 듣던 AI도 함께 맛이 가버렸다. 급한 마음에 밥을 흡입을 하고 난 뒤에 한번 고쳐볼 요량으로 얇은 드라이버를 들고 앉았다. 일단 어찌어찌 틈을 좀 더 벌여서 튀어나온 내장들을 안으로 밀어 넣고 벌어진 틈을 꽉 눌러 닫기는 했는데, 버튼들이 말을 듣지 않았다. 게다가 버튼을 눌렀을 때에만 빨간불이 들어와야 하는데, 계속 불이 들어와 있는 상태가 지속됐다.

TV야 뒷편에 있는 작은 버튼들로 수동 조절을 해서 겨우 볼 수 있었지만, 문제는 우리는 이미 그런 수동 조절엔 익숙해 있지 않다는 것이다. TV에 별 관심이 없는 큰 애는 자기 방으로 들어가 버리고 작은 애는 핸드폰을 보면서 소파에 앉았는데, 나 혼자 조바심에 동동거리고 있었다. 이래도 안되고 저래도 안되는 상황이 한참 지속되는 찰라, 불현듯 ‘이걸 바닥에 한번 더?’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해결책을 찾다 못해 그 전처럼 내동댕이치지는 않았지만 바닥에 살짝 또 떨어뜨렸다. 그 결과 신통방통하게도 리모컨이 원래대로 제 기능을 되찾았다. 지금은 잘 된다.

어렸을 때 TV는 집 다음의 재산목록이었다. 흑백의 14인치 브라운관에 저녁마다 온 가족의 이목이 모아졌다. 하지만 때때로 필요한 일이 있었으니, 가끔씩 화면이 찌그러지거나 지직거리기도 했는데 그때마다, 마당 옆 화장실 담벼락 위로 높이 솟아 있는 안테나를 돌려야 했다. 비바람 부는 날이면 가족들 중 남자들이 번갈아 가며 어김없이 비 맞은 생쥐 꼴이 되어야 했다. 그 외에 자잘한 이상 징후들에는 매가 약이었다. 화면 상태가 조금 이상해 지면 손바닥으로 TV 위나 옆을 툭툭 치면 바로 잡히곤 했는데, 희한하게도 가면 갈수록 때리는 강도가 높아져야 했다. 어른들은 툭하면 ‘한국 텔레비전은 맞아야 말을 들어’라는 얘기를 하곤 했다. 덕분에 당시 어린 마음에 나도 미제나 일제에 비해 뒤떨어지는 국산 전자제품은 때려야 말을 듣는 것으로 생각했다.

 

때려야 말을 듣는다는 믿음이 생기기까지

때려야 말을 듣는 것은 TV만이 아니었다. 군대시절까지 주구장창 들어온 말이 ‘한국 사람은 맞아야 정신 차린다’는 말이었고, 생각만해도 끔찍하지만 ‘사흘에 한번씩 북어 때리 듯 패야 한다’는 말도 심심찮게 들을 수 있었던 시절이었다. 회사라는 곳에 근무를 할 때도 ‘가만히 내버려둬선 안 된다’거나 ‘서로서로 견제하고 감시하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궤변이 횡횡했다.

어떤 일을 시켜놓고 맘을 놓지 못해서, 같은 일을 또 다른 사람에게 시키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한술 더 떠서 조직 내에 분명히 그 일에 대한 전문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만만해 보이는 문외한에게 뒷조사를 맡기기도 했다. 덕분에 그룹의 아주 내밀한 전략회의 때에 드물지 않게 들었던 말이, “저는 잘 모르지만, 이건 아닌 것 같습니다”는 말이다. 문외한이기 때문에 전문가 직원이 하는 일에 대해서는 전혀 이해도 할 수 없지만, 시킨 사람이 좋아할만한 대답을 찾아내야 하기에 나오는 말이다.

경험에 비춰보면 조직 내에서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많은 일들이 그렇게 그 일에 대해서는 단 한번도 경험해보거나 생각해 보지 않았던 문외한의 결정 대로 되는 경우가 너무 많았다. 일은 하고 있는데, 믿음을 줄 수 없거나 주기 싫은 사람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일은 전문가 직원에게 시켜놓고 평가는 문외한에게 맡겨버린다. 결과는 불문가지.

때문에 브리지워터 어소시에이츠의 회장 레이 달리오 (Ray Dalio)는 그의 명저 ‘원칙(Principles)’에서 “제발 책임이 없는 사람들에게 질문하지 마라. 더 나쁜 것은 아무한테나 질문하는 것이다.” 라고 강조하고 있다. 나는 레이 달리오가 한 이 말에서 문장의 제일 앞에 있는 ‘제발’에 방점을 찍고 싶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아무 생각 없이 자신의 지위와 힘을 믿고 아무에게나 아무 말이나 던지는지를 꼬집기 위해서인지를 강조하기 위해서 ‘제발’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았을까 싶다.

‘Please’나 ‘제발’ 같은 말은 레이 달리오 급의 인사 정도면 거의 쓸 일이 없는 말이다. 그런데 굳이 문장 첫머리에 썼다는 것은 그만큼 강하게 바란다는 뜻이 아닐까? 브리지워터 어소시에이츠는 1975년도에 설립된 미국의 헤지펀드로 연금펀드, 재단, 외국 정부, 중앙은행 등의 그야말로 기라성 같은 기관투자자들을 대상으로 1,220억불 규모의 자산을 운용하고 있다. 한화로 약 150조원을 굴리고 있는 미국 내에서도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투자기관이다. 그런 조직의 수장이 ‘제발’이라고 하고 있다.

참으로 신기한 일이 늘 벌어지고 있다. 조직마다 매일 일일 보고, 매주 주간 보고, 매달 월간 보고, 그리고 그 외에도 비주기적으로 보고가 늘 이루어진다. 보고하는 사람이나 보고받는 사람이나 늘 그 시간이면 집중해서 점검하고 체크한다. 그것도 모자라서 잘 하고 있는지 이 사람 저 사람 시켜서 이중 삼중 감시 감독 관리를 한다고 하는데, 한참 지나고 보면 한 것이 아무 것도 없는 경우가 많다. 불가사의하다. 아무 것도 하지 않기 위해 그렇게들 열심히 하고 있다. 차라리 서두에 지인이 한 말 두 마디 ‘믿는다. 하던 대로 열심히 해’라는 말 일년만 해보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