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창한 하늘과 달리 바람이 제법 쌀쌀하게 불던 21일 저녁, 곱창 집들이 집단으로 모여 있는 서울 왕십리 한 식당에서 일용직 근로자로 일하고 있는 류진수(가명·36·남)씨를 만났다.

경기가 조금만 악화 되도 차갑게 얼어붙고 조금만 풀리면 다시 활기가 넘치는 곳이 바로 인력시장이다.

하루하루 일당이 지급되고 고정되지 않은 채 매일 다른 곳에서 다른 일을 해야 하는 인력시장 종사자들은 경기 악화의 최전선에서 아무런 보호막도 없이 직접 몸으로 부딪히며 이를 버텨내고 있다.

류 씨가 최근에 나가고 있는 곳은 일산에 있는 인력시장이다. 인력공급 사무소에 이름을 등록하고 이른 새벽에 그곳으로 나가 있으면 일감이 들어올 때 마다 사무소측이 적절한 사람들을 파견하는 시스템이다.

올해 들어 ‘노가다판’ 크게 줄어
그가 받는 일당은 일감에 상관없이 무조건 7만원. 이중 10%를 사무소 측에 수수료로 낸다. 서울 곳곳에는 동네마다 하나씩 이런 인력 사무소가 있고 그곳에는 매일 새벽마다 류 씨와 같이 하루 일당을 벌기 위해 나오는 노동자들이 모인다.

인력시장에서 느끼는 지금의 경기 상황에 대해 류 씨에게 묻자 단적으로 “나쁘다”라고 대답했다. 일감이 없어 쉬는 날이 많아졌다는 것이다.

인력시장에서 공급되는 인력들이 하는 일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소위 ‘노가다’라고 불리는 몸으로 때우는 일이다.

대부분 공사 현장에서의 잡역이나 아니면 기업체의 공장에서 폐기물을 처리 하는 등 몹시 힘들고 거친 일들이 주 업종이다. 그에게 지난해와 올해의 차이점을 묻자 바로 이 ‘노가다판’이 줄어든 게 가장 큰 차이라고 했다.

지난해에는 이런 일감 들이 많았다고 한다. 열흘 중에 이틀 정도 쉬는 날이 있을 뿐 거의 대부분 일찌감치 일감을 받아 현장으로 갈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사무소에서 기다리다 보면 차가 와서 사람들을 실어다가 지방의 공사 현장으로 이동했다”며 “안산이나 시화, 제부도 들어가는 입구 같은 곳에 진흙집을 짓는 현장이 무지하게 많았기 때문이다”고 말했다.

류 씨가 말하는 진흙집이란 몇 년 전부터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웰빙 하우스’를 말한다. 소규모 건설업자들이 ‘돈 좀 있는’ 계층들에게 영업을 해 별장 비슷하게 경기 지역에 황토 집을 지어 팔았던 것이다.

류 씨는 “작년에는 흙집 짓는 일이 많다 보니 회사(건축업체)들이 인력시장에서 사람을 왕창 데려다가 공사를 빨리 끝내려고 했다”며 “그러다 보니 인력시장이 활황을 이룰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그런데 올해에는 작년에 한창 많이 짓던 흙집 공사 같은 게 거의 사라졌다고 들었다”며 “설사 그런 현장이 있다고 해도 업체들이 자기네 직원들을 직접 동원해서 공사를 하지 인력 시장에서 막일꾼을 데려다 쓰지는 않는다”고 설명했다

그렇다면 최근에는 어떤 일감이 많으냐고 묻자 주로 물류창고의 하역작업이라고 말했다. 일산 지역에는 홈쇼핑 사나 인터넷쇼핑몰들이 많아 들고 나는 물건들을 하루 종일 창고에서 나르고 정리하고 차에 싣는 일이 많은데 여기에 주로 인력시장에서 사람들을 데려다 쓴다는 것이다.

전문기술 인력도 몰려들어
지난해와 비교해 경기 변화를 체감할 수 있는 것이 줄어든 일감뿐이냐고 묻자 류 씨는 또 하나의 중요한 변화를 얘기 했다. 바로 인력시장에 나오는 사람들, 특히 젊은 층들이 급격히 늘었다는 것이다.

그는 “이제 내 나이도(36세) 인력시장에서는 중년이 되어 버렸다”며 “대학까지 멀쩡하게 나온 20대 젊은이들이 인력시장에서 눈에 띄게 늘고 있어 우리 일감을 상당부분 뺏기고 있다”고 말했다.

또 “공장 같은데서 일하다 회사를 관둔 전문 기술 인력들도 인력시장으로 많이 들어오고 있어 막일꾼들 보다는 그런 사람들이 더 잘 팔리고 있다”며 “이래 저래 우리 일감은 작년 보다 줄어들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며 어려움을 토로 했다.

류 씨의 설명대로라면 일감도 줄었지만 20대의 ‘청년백수’들과 직장에서 해직당한 인력들이 대거 인력시장으로 유입되고 있다는 얘기다.

젊은이들과 해직 공장 근로자들이 인력시장으로 유입되고 있다는 것은 확실히 현 경기 상황이 바닥이라는 것을 대변해주고 있는 얘기다.

해직 근로자들은 재취업이 안 되어 일당 벌이로 나설 수밖에 없고 취업이 안 되는 청년들은 하다못해 핸드폰 이용료라도 내기 위해 막일에 나서고 있다는 것이다.

앞으로 우리나라 경기가 좋아질 것 같으냐 나빠질 것 같으냐고 묻자 류 씨는 “그런 것은 모르겠다”며 “그러나 일감이 늘 것이냐 줄 것이냐를 생각해보자면 크게 늘어 날 것 같지는 않다”고 말했다.

그는 “노가다가 잘 팔리려면 공사현장이 늘어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며 “집짓고 도색하고 도로를 놓고 이런 일들이 많아지지 않는 한 우리 들한테 경기 회복은 먼 얘기”라고 단정 지었다.

류 씨는 최근 인력시장에 나가는 것을 그만 뒀다. 예전처럼 일감이 많지도 않은데다 비전이 없는 일에 더 이상 하루하루를 소비 하는 게 싫었기 때문이다.

그는 최근 안성에 오픈하는 골프연습장에 구두닦이로 취직이 결정되어 현재 기술을 배우는 중이다.

류 씨는 “골프 연습장에는 돈 있는 사람들이 오다 보니 구두 닦을 일도 많다”며 “노가다나 구두닦이는 거기서 거기처럼 보이겠지만 고정적인 수입이 있는 일이라는 점에서 하늘과 땅 차이”라며 미소 지었다.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고 있지만 그 상황에서도 여전히 활로를 찾아 위해 고군분투하는 류 씨의 모습에서 지금은 바닥이지만 언젠가 다시 경기가 회복될 수 있다는 희망을 어렴풋이나마 엿볼 수 있었다.

안승현 기자 zirokool@ermedia.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