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도수 바위에 새겨지다, 240×86×220㎝, 혼합재료

김경원 작가는 2015년부터 실제로 독도를 찾아 자료를 수집하고 스케치를 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울릉도와 독도의 설화 이야기를 작품에 담았다. 그 중 1953년 독도와 제주도를 오가며 활동한 제주 해녀와 독도가 서식지인 강치의 이야기를 모티브로 만든 ‘해녀와 강치’는 잘 알려진 작품이다. 이야기를 담은 작품들은 그대로 삶을 보여줬다. 물론 그 삶은 시간과 공간을 포함한다.

2017년 11월29~12월17일 동안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에서 열린 ‘한국의 진경 독도와 울릉도(REAL LANDSCAPE OF KOREA DOKDO & ULLEUNGDO)’단체전‘에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의인 배도수에 대한 이야기를 작품으로 담았다. 바닷길을 따라 한참을 가야 닿을 수 있는 섬이라는 공간에서, 오랫동안 혹은 멀지 않은 시간 동안 이어졌던 우리의 삶의 이야기를 예술작품으로 다루면서 독도가 우리의 영토라는 것은 물론 그 땅을 지켜낸 사람들의 이야기를 작품으로 담아냈다.

김경원 작가의 ‘배도수 바위에 새겨지다’ 작품은 울릉도 코끼리바위 형상을 한 인공바위 단면에 울릉도 수령을 지낸 배상삼(줄여서 배도수)의 억울한 원혼을 달래는 묘비명을 새긴 작품이다. 묘비명 내용은 다음과 같다. “배도수는 백성에게 선정을 행했으나 기득권자들에게 중상모략 당하고 눈에 고춧가루 뿌려져 맞아 죽었다. 진실을 눈감은 자들에게 역사의 정의는 무엇인가. 의인의 죽음도 값이 없다.”

작가는 “너무 멀지 않은 인물에 대한 이야기인데다 관련 인물들의 가족들이 울릉도에 살고 있어서 조심스럽기도 하다. 예술은 관점에 대한 작가의 해석이다. 배도수이야기를 통해 이 나라를 지켜온 의인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라고 밝혔다.

◇다음은 “민속신앙 및 설화문화로 본 울릉도 독도 연구, 경상북도 한국국학진흥원, 2016. 12”에서 작품관련 글을 발췌, 요약했다.

배상삼은 대구사람으로 본명이 영준(永俊)이었으나 개명하였다. 동학에 연루되어 울진의 전재환의 집에 칙령이 내려지자 정감록을 신봉한 전재환 일가와 함께 울릉도에 들어왔다. 홀아비로 입도한 배상삼은 사동 동편에 살고 있던 안동김씨 큰댁의 과수서 독립생활을 하면서 대장간을 차렸다. 농기구도수가 된 배상삼은 일본인들의 목재도벌 등을 울릉도민에게는 자못 선정을 베풀었다고 한다.<울릉군, 울릉군지, 2007, 197~198쪽>

조선 태종 때부터 울릉도는 금단의 섬이었고, 1883년에 고종황제의 명으로 재개척 되면서 합법적으로 사람이 살기 시작했다. 그러나 일본인의 벌목이 횡행하고, 기근으로 개척민의 삶은 고달프기 그지없었다. 당시 울릉도에는 도장(島長)이라 해서 정부에서 파견한 관리가 있었지만 정부에서 지급하는 월봉도 없었고 그 수하에는 단 한 사람의 부하도 없었다. 또한 '월송만호 겸 울릉도첨사'를 겸직하는 형식이어서 울릉도에 상주하지도 않았기에 배상삼처럼 도수를 임명해서 도장의 역할을 대신 하도록 했다.

이러한 배경에서 배상삼 도수의 위력에 일본인들은 기를 펴지 못하고 목재 도벌도 못하여 전전긍긍하였고, 배도수에게 억눌려 있었던 몇몇 부유층이면서 야심이 있던 개척민들이 그를 제거하려는 뜻을 갖기 시작하였다. 1895년 겨울 개척민 가운데 배도수를 시기하던 3인이 모여 배도수를 제거하는 모의를 하였고, 그 과정에서 동조자 5인을 합하여 8사람이 모의에 참여하였다.

울릉도 주민들은 이들을 일컬어 8명의 부랑꾼(불한당)이라 하면서 그들을 비판적 시각에서 바라보고 배상삼을 죽인 후 제명에 살지 못하고 비명횡사했다고 이야기한다. 정부의 무관심과 일본으로부터의 위협 속에서 주민들을 보살펴준 배상삼에 대한 고마움을 기억하고 안타까운 죽음을 애도하는 것이다.

《한 장정이 몰래 간직하고 들어온 고춧가루를 배도수의 눈에 뿌렸다. 8인의 음모자들은 일제히 방망이로 배도수의 머리를 후려치는 동시에 각자 소지하고 있던 목침을 던졌다. 8인의 음모자들은 앞을 못 보는 배도수를 일제히 공격하여 무차별 난타하였고, 배도수는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주먹을 휘두르니 나무를 치면 나무가 부러지고 돌을 치면 돌이 박살났다. 그러나 결국 뭇매를 못 이기고 머리가 깨어지고 어깨가 부러지고 유혈이 낭자한 채 실신하고 말았다.

이를 본 8인은 배도수를 재차 몽둥이로 난타하여 완전히 죽이고 시체에다 덕석을 덮어두고 땀을 씻으며 술을 나누어 마셨다. 그때 배도수가 소생하여 숨을 내뿜으니 덮어두었던 덕석이 벗겨졌고 평소 자기와 친한 사이인 홍재유를 부르며 “재유야, 나 물 좀 두가.”라고 말하였다. 홍재유가 물을 가져다주려 하자 8인중 1인이 오줌통을 갖다 주었다. 한말이 넘은 오줌을 한숨에 들이마시고 홍재유가 물을 준 줄로 알고 "재유야, 너의 은혜는 죽어도 잊지 않는다." 하였다. 이를 본 8인은 재차 몽둥이질을 하니 배도수는 영영 죽고 말았다."<울릉군, 「울릉군지」, 2007, 813-814쪽>》

배상삼이 죽자 8명의 살인자는 왜인에 기대어 기고만장 했다. 그러나 이들의 종말은 매우 비참했다. 「울릉군지」는 사건 이후 8명에 대한 행적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배도수 암살 후에는 왜인들의 도벌과 행패가 극심하여 개척민들은 온갖 고초를 당하였으며, 8인은 의기가 양양해져 왜인들에게 아부하면서, 밀상(密商)을 마음대로 하였다.

그러나 8인은 그 후 목매어 자살하거나 익사하거나 산에서 추락사 하는 등 대부분이 비명횡사 하였고, 그 가운데 1명만 와석(臥席) 종신(終身)하였으나, 그 사람도 90여 세까지 살면서 천둥, 번개와 함께 소나기가 쏟아지면 상에 정화수를 떠 놓고 소나기를 맞으며 절을 하는 것이 여러 번 목격되었다고 한다.<울릉군, 「울릉군지」, 2007, 814쪽>》

<자료제공=김경원 작가(SCULPTOR KIM GYUNG WON, ARTIST KIM GYUNG WON,김경원 작가, 조각가 김경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