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라고 불리는 그리스 신화가 있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인 프로크루스테스는 아테네 교외를 오가던 나그네들을 상대로 나쁜 짓을 일삼던 강도였는데, 그는 특이한 침대를 하나 가지고 있었다. 프로크루스테스는 나그네를 붙잡아 자신의 침대에 눕혀놓고 나그네의 키가 침대보다 크면 그만큼 잘라내고, 키가 침대보다 작으면 억지로 잡아 늘여뜨려 죽였다. 이 이야기는 주로 ‘타인을 내 기준에 억지로 끼워 맞추려는 횡포나 독단’에 대해 경고할 때 인용된다.

내게도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라고 부를만한 것이 있지만 사정이 좀 특별하다. 나의 경우 내 기준에 맞춰 상대방의 발을 자르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기준에 맞춰 내 발을 자르기 때문이다. 좋은 말로 하면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사람’이고, 나쁜 말로 하면 ‘호구’ 정도가 되겠다. 그저 ‘좋은 게 좋은 거다’라며 살아오다 보니 이렇게 되어버렸는데 요즘 들어 이런 성향이 여간 불편한 게 아니다. 거절하지 못해 귀찮은 일을 떠맡게 되거나, 무례한 상대에게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집에 와서 뒤늦게 분통을 터뜨리거나 하는 일은 너무도 빈번하게 일어나서 대단치 않게 느껴질 정도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올해 초에는 ‘덜 둥글고 더 날카로운 사람이 되자’라는 목표를 세우기도 했으나 2020년의 1분기가 끝난 시점에도 여전히 ‘호구티’를 벗지 못했다.

호구의 단점은 많고도 많지만, 경험상 가장 안타깝고도 위태로운 단점은 바로 ‘비판적인 능력을 상실한다’는 것에 있다. 어떤 상황이나 사건에 대해 이견의 목소리를 내는 것이 어렵다 보니 언제 어디서고 중립 기어를 넣어둔 상태다. 대립이나 분쟁을 극도로 꺼리기에 얼핏 보면 평화주의자나 이상주의자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연약한 초식동물에 가깝다. 급기야는 의견이나 감정을 아웃소싱하기에 이르러, 스스로의 경험보다는 여론에 의지해 무언가를 판단하는 경우도 많다.

얼마 전 베스트셀러라는 책 한 권을 읽었다. 명성과는 다르게 내용은 식상했고 문장은 허술했다. 내 딴에는 이 책이 왜 베스트셀러인지 이유를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베스트셀러라지 않은가. 수많은 독자들이 높은 평점을 준 책이지 않은가. 내 판단과는 별개로 내 마음속의 ‘호구’가 스멀스멀 고개를 들었다. ‘그래. 베스트셀러에 공감하지 못하는 내가 아웃사이더인 거야. 다른 사람들은 이게 좋다잖아.’ 호구의 지휘 아래 내 의견은 점점 더 초라해져 갔고, 급기야는 자기 비하로 이어졌다. ‘너 까짓 게 무슨 베스트셀러 작가를 평가해. 유명한 데는 다 이유가 있는 거지.’ 나는 어느새 직접 만든 침대에 스스로를 올려놓고 재단하고 있었다. 판단의 기준은 타인에게 있었다.

나는 여전히 ‘비판적인 사람’을 꿈꾼다. 타인의 영향에 덜 취약한 사람이 되고자 노력한다.

‘다시 책으로’의 작가인 매리언 울프는 비판적인 능력의 필요성을 강조하며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자신만의 조타실을 가져야 합니다.”

호구에서 벗어나겠다는 다짐은 내 잇속만 챙기겠다는 뜻이 아니다. 비판적인 사람이 되겠다는 말은 남의 말에 공연히 트집을 잡거나, 누가 봐도 틀린 주장을 부득부득 우기겠다는 뜻이 아니다. 작가 마크 에드먼드슨의 말대로, ‘개인적인 믿음과 확신을 검토하고, 잠재적으로는 그것을 뒤집을 수도 있는 힘’을 기르겠다는 뜻이다.

다시 프로크루스테스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그의 침대는 매우 특별하게 제작되어 어떤 나그네도 그 길이에 딱 맞을 수가 없었다고 한다. 일단 침대에 몸을 눕힌 사람이라면 무조건 죽임을 당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발이 잘리든, 목이 늘어지든.

내게도 있는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에 더 이상 아무도 눕히지 않기로 다짐한다. 그게 나든, 타인이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