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이미지투데이

[이코노믹리뷰=이가영 기자] 공기처럼 우리 생활 가까이 있지만 중요성을 잘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 있다. 바로 ‘철(鐵)’이다. 철은 지구 중량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광물로 흔한데다 값이 저렴하고 가공이 쉬워 인류의 역사 면면에서 다양하게 활용돼왔다. 아주 작은 바늘은 물론이고 반도체, 디스플레이, 우주정거장, 로켓 등 첨단 제품에 이르기 까지 철이 쓰이지 않는 곳은 없다. 철을 현대 도시문명의 근간이자 산업의 쌀이라 부르는 이유다. 

그러나 최근 철강업은 공급과잉 현상의 지속과 글로벌 경기 부진, 산업구조 변화 등으로 인해 유례없는 위기를 겪고 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코로나19로 인한 전 세계적 철강 수요 감소도 예상되면서 철강업계의 근심은 더욱 깊어지는 상황이다. 일각에서는 철의 시대가 저무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나온다. 이에 철강기업들은 다양한 변혁으로 위기에 맞서고 있다. 

한국 철강, 한국전쟁·IMF 거치며 고군분투 성장

한국 철강업은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성장 기반을 다졌다. 특히 전후부흥정책의 일환으로 추진된 기존공장의 복구 및 가동, 부산제철소(현 동국제강)의 전기로 설비 최초 도입(1963년)등을 통해 여러 민간 기업이 산업의 기초를 닦았다.

이후 1970년 철강공업육성법 제정에 이어 일관제철사업에 대한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포항제철(현 포스코)의 제 1기 고로가 준공(1973년)돼 명실상부한 일관 생산체제를 갖추게 됐다. 이어 제 2기~제 4기까지 연이은 건설을 계기로 구조적 불균형, 시설의 노후화와 영세성 등의 문제가 상당 부분 해소되면서 국내자립도 역시 크게 향상됐다. 국내 철강산업은 이 시기에 큰 폭의 설비 확대를 추진했고, 신규 전기로 업체도 등장하면서 대형화 추세가 가속화되는 등 비약적인 성장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한국 철강업의 부흥기로 불리는 1980년대 이후 1990년대 초반까지는 건설· 자동차·기계·전자 등 수요산업의 높은 성장세를 바탕으로 포항제철 광양제철소 종합 준공(1992년)및 전기로 업체의 대규모 설비확장 등 양적·질적 성장이 이뤄졌다.

1997년까지 성장을 이뤄오던 국내 철강업은 1998년 외환위기에 따른 구조조정기를 겪게 된다. 외환위기로 철강수요가 급감하면서 확대된 설비능력을 이용하지 못해 직격타를 맞게 된 것이다. 그 결과 1997년부터 1998년에 한보철강, 기아특수강, 삼미특수강 등 11개 철강업체의 부도와 함께 조강 생산설비 500만톤을 폐쇄하는 사상 최악의 사태를 겪기도 했다. 

이에 따라 국내 철강업은 생존의 길을 찾기 위해 구조조정을 적극 추진하고 세계 철강산업의 변화에 따른 기술·경영상의 성장전략을 모색하기 시작한다. 2004년 INI스틸(현 현대제철)이 한보철강을 인수한 것이 대표적이다. 

 

한 차례 위기를 겪은 국내 철강업은 1990년대 말과 2000년대 들어 더욱 눈부시게 성장했다. 특히 포스코는 포항 4개 고로와 광양 5개 고로의 풀가동에 힘입어 1998년과 1999년 세계 최대 철강사 자리(생산능력 기준)를 차지했으며, 2007년에는 세계 최초로 가루 형태의 철광석과 유연탄을 그대로 연료로 사용할 수 있는 파이넥스(FINEX)설비를 준공하기도 했다. 이에 따라 포스코는 2018년 기준 연간 4300만 톤의 생산능력을 바탕으로 세계 5위 철강사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고로를 보유한 포스코뿐 아니라 전기로 업체들의 발전도 눈부셨다. 특히 1980년대 후반부터 경기회복과 건설산업 호황에 힘입어 철근·형강 등 건설자재 수요가 크게 늘자 전기로 설비 증설이 대대적으로 이뤄졌다. 이로 인해 현대제철과 동국제강이 몸집을 키우며 대형 철강사로 도약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 특히 현대제철은 2010년과 2013년 각각 2기, 3기 고로를 준공하면서 제 2의 일관제철 업체로 등극하기도 했다. 

포스코를 중심으로 한 국내 철강사들이 비약적 발전을 거듭하면서 세계 철강산업에서 한국이 차지하는 비중도 높아졌다. 세계철강협회에 따르면 지난해 한국의 조강 생산량은 7140만톤을 기록해 세계 6위를 기록했다. 전 세계 생산량의 3.8%다. 

한국은 소비 측면에서도 자동차와 조선, 건설 등 관련 수요산업의 발달에 힘입어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각 국의 철강 소비수준을 나타내는 국민 1인당 철강 소비량 에서 한국은 2018년 기준 1106.3kg을 기록해 12년 연속 1위를 기록했다. 이는 주요 철강 소비국인 중국(522.8kg)의 두 배에 달하며, 전 세계 평균 214.5kg의 5배 수준이다. 

철강 강국인 만큼 국내 산업에서 철강업이 차지하는 위상도 남다르다. 2018년 기준 포스코·현대제철·동국제강·세아제강 등 우리나라 1차 철강 제조업은 1321개 사업장과 약 7만6000명의 근로자가 종사하고 있는 국가 기간산업이다. 고용 창출 효과는 제조업의 3.0% 수준에 달한다. 아울러 수출도 2000년 76억달러에서 2018년 340억달러로 4배 이상 늘어 전체 수출품목 가운데 6위를 차지했다. 

저무는 철의 시대… 공급과잉·수요둔화·코로나19 까지

눈부신 성장을 거듭하던 철강산업은 10년 이상 긴 어둠의 터널을 통과하는 중이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와 유럽 재정위기 등으로 철강 수요가 침체되기 시작해 2009년 하반기부터는 전  세계 철강수요가 본격적으로 정체기에 진입했다. 수요보다 생산능력이 많은 공급과잉 상태와 함께 전후방 산업 침체로 인한 수요 둔화, 각국의 보호주의 강화, 환경규제 등도 철강업 쇠락을 부채질 했다. 

특히 공급과잉은 철강업의 고질적인 문제로 꼽힌다. 글로벌 금융위기를 전후로 세계 철강 소비는 둔화하고 있지만 설비능력은 계속해서 증가하고 있다. 실제 포스코경영연구원에 따르면 지난해부터 2021년까지 세계 철강 생산능력은 아시아(5300만t), 중동 및 아프리카(2800만t) 등을 중심으로 꾸준히 확대될 전망이다. 개발도상국들이 경쟁적으로 설비를 확장할 것으로 예상돼서다. 

넘치는 공급과 달리 철강재 수요는 자동차·조선·건설 등 연관 산업의 불황 탓에 정체 상태를 이어가고 있다. 세계철강협회는 지난해 10월 올해 철강 수요 증가율이 1.7%에 그칠 것으로 내다봤다. 전년 3.9%와 비교하면 반토막 수준이다. 설상가상으로 수요산업이 살아나고 있다고 해도 국내 철강수요가 증가할 가능성은 희박하다. 선진 철강국가의 사례를 보면 1인당 소득 2만 달러 시점에서 1인당 철강소비는 정점에 도달한다. 

 

국내 철강업체들은 내수가 부진하면서 수출 확대를 통해 활로를 찾고 있으나 보호무역주의 기조가 강해지면서 이마저도 여의치 않는 상황이다. 코트라(KOTRA)의 ‘2019년 대한국 수입규제 동향과 2020년 상반기 전망’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 대(對)한국 수입규제는 29개국에서 총 210건으로 역대 최고를 기록했다. 이 가운데 철강·금속이 99건으로 압도적 1위를 차지한다. 

환경규제 강화 움직임도 철강업계에는 또 다른 부담이다. 전 세계적으로 환경 보호에 대한 중요성이 커지고 있는데다, 국내의 경우 특히 미세먼지가 사회 문제로까지 번지며 강도 높은 환경 투자에 대한 사회적 요구가 형성된 상태다. 온실가스 배출권거래제, 미세먼지 규제 강화, 고로 브리더 개방에 따른 비용 부담 증가 등은 철강업계의 추가적인 비용 부담을 감수하게 만들고 있다. 

설상가상으로 최근에는 코로나19의 전세계적 확산으로 글로벌 수요가 둔화되면서 철강업계의 위기감은 더욱 커지고 있다. 최대 철강 수요처인 자동차 생산 기지는 셧다운 상태이고, 코로나19가 경기 침체로 이어지면서 선박·건설 등 다른 산업의 수요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다. 

상황이 이쯤 되면서 글로벌 철강사들도 앞 다퉈 감산에 들어갔다. 세계 최대 철강업체인 아르셀로미탈은 이탈리아 타란토제철소에서 25% 감산을 결정했으며, 프랑스와 스페인에서는 고로 4기의 일시 가동중단을 결정했다. 미국 철강사 US스틸 또한 고로 2기 가동 중단을 결정했으며, 일본제철도 고로 2기를 4월안에 중단시켜 연간 600만 톤(t)가량 감산할 예정이다. 

철강 수요가 가파르게 감소하면서 세계철강협회는 매년 4월과 10월에 정기적으로 내놓던 철강 수요에 대한 단기전망 발표를 6월로 잠정 연기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선진국 제조업 업황이 빠르게 침체되면서 2분기 이후 철강 수요가 얼마나 줄어들지 예상하기 어렵다는 게 협회의 설명이다. 

철강업계 관계자는 “코로나19로 인한 전방산업 수요 감소에 중국 철강업계의 생산량 확대,  마이너스 유가에 따른 미국 셰일가스 업체들의 강관 제품 수요 감소 등이 이어지고 있어 올해 최악의 보릿고개가 예상되는 상황”이라고 우려를 표했다. 이어 “이 같은 상황이 장기화될 경우 철강업 전반의 구조조정이 본격화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