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못 믿을 것이 ‘검은 머리 짐승’이다.

어렸을 때에 어른 들이 하는 이 말이 어떤 뜻인지 몰랐다. 문학 작품에 종종 등장했던,인간 같지 않은 사람들을 우회적으로 욕(?)하는 정도로 이해한 것이 전부였다.사실 대학생 때만해도,  이런 얄팍함을 보이는 인간들로부터 큰 피해를 입은 적이 없기 때문에 굳이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러나,조직에 들어와 함께 일하면서 ‘사람을 믿는 것’이 얼마나 미련한 짓인지 알게 되었다. 몇 번의 큰 실패를 가져온 주변의 사기에 가까운 배신을 경험하기도 했지만, 인간의 이기심에 의해 어떤 결정도 내릴 수 있음을 알게 되면서 ‘솔선수범’이라는 가치를 되새겼다고 본다.

누군가에게 믿고 맡기기 보다는 그가 그 일을 할 수 밖에 없도록 하는 내외적 자극(동기부여)과 함께, 적절한 목적과 목표에 대한 가이드를 줘야한다는 것, 이를 꾸준히 함께 관리하며 끝까지 해내는 것의 가치를 일깨워주는 것, 다시 유사한 일을 할 때 기존의 방법론을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적용하려는 생각과 함께 이러한 의지가 있다는 것을 어떤 식으로 보여줘야 한다는 것까지 말이다.

이 모든 것이 조직에서 함께 일하는 사람간의 기본 예의이자 매너이다. 누군가에게 믿고 맡기는 것은 오직 나와 비슷한 레벨 또는 실력을 갖추고 있는 사람한테만 할 수 있는 태도라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여기에도 100% 신뢰는 있을 수 없다.관점에 따라, 나와 연결된 그의 일이 기대 이하를 보일 때가 있고, 이를 보완하기 위해서는 또 다른 대비책을 세워야 하는 것을 늘 염두에 두는 것이다.

물론, 이 모든 것은 이전 보다 더 나은 결과(성과)를 만들어야 하는 것 때문이었다. 조직 또는 비즈니스이기 때문에 ‘꾸준한 성장’을 해야 한다는 것과 함께, 이를 오래도록 지속가능 할 수 있도록 만들고자 하는 개인의 욕심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욕심을 타인에게 드러내는 것이 별 의미 없다는 것을 조직 및 사회 생활을 하면서 경험하게 되었다. “타인에 대한 기대가 나에게는 큰 의미를 주지 못하는구나…” 그리고는 사람에 대한 기대는 거의 하지 않는 편이다. 그렇다고,이론상의 X, Y 이론을 믿지 않다거나, 성선설 대비 성악설을 더욱 맹신한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인간의 불확실성 또는 비이성적 선택과 결정,행동 등이 어느 자리에 있던지 할 수 있음의 가능성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사람이기 때문에,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현재 보다 나아진 자신의 모습을 위해 해보지 않았던 선택을 하거나, 가보지 않은 길을 가는 등의 무모한 모험을 하기도 한다는 것을 말이다.

왜 그런 선택을 하는지 알 수 없다.하지만,그럴 때마다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것을 잘 안다. 다만, 그 선택이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필요한 시스템을 마련하거나, 별도의 장치를 통해 가능성 자체를 최소화 하는 것이다.

그리고는 다음과 같이 스스로를 다독이다. ““괜찮아,그럴 수 있어.” 라는 말을 입 버릇처럼 한다. 세상에 이해 못 할 것은 없다.잔혹한 범죄를 포함한 사회적 정의에 위배되는 일을 하는 하는 이들을 제외하고 말이다.

자신이 이뤄놓은 것 보다는 더 높은 가치를 인정받고 싶어하는 마음,기왕이면 더 높은 자리로 올라가고 싶은 마음, 지금 보다 같은 일을 하면서 더 많은 연봉을 받고 싶은 마음, 더 나은 삶을 위해 필요 이상의 행운이 뒤따르기를 기대하는 것 등 말이다.

과거에는 이를 애써 부정해왔다. ‘21세기 선비 정신’이랄까… 그러나, 그 모든 것이 부질없다고 느끼는 순간 사람에 대한 기대는 접은 상태다. 당장 그 사람에 대한 기대보다는, 그 사람이 내가 해주는 몇 마디 말과 글로 인해 자신이 원하는 삶의 일부라도 발견하거나, 현재보다 0.01mm 만이라도 나아갈 수 있으면 그걸로 충분하다.

오직 기대하는 것은 그 부분이다. “지금 보다 나아지길 기대합니다.” 지금 당장 나아진 모습을 바라는 것은 보다 현명하고,합리적이고,논리적 선택을 할 수 있기를 기대하는 것은 어찌 보면 무리라는 생각이 든다.

이는 사람들은 각자의 세계관 속에서 오래도록 보이지 않게 단련된 생각의 루틴 또는 스키마가 있기 때문이다. 과연 이를 모조리 부정하고, 새로운 사고(생각하는 방식과 방법) 체계를 다시 세울 수 있는 신에 가까운 인간이 있을까 싶다.

최근 모 대기업 조직에서 20여년이 넘도록 일을 하신 분의 코칭을 맡았다. 결과는 실패였다. 실패 원인은 잘 안다. 내 코치로서의 역량 부족이 첫번째다. 그가 바라는 것을 당장 주기에는 그가 불안해 보였다. ‘찾았다고 생각한 순간, 그동안 참아왔던 에너지를 폭발시켜 앞으로 달려나갈 듯한 자세’였기 때문이다.

그래서,그를 진정시키기 위해 애를 썼다.앞으로 몇 년의 시간 동안 일을 해야하고, 지금까지 해왔던 만큼 앞으로도 일을 해야하기 때문에,과거의 일을 선택하고 진행했던 방식을 버려야 한다고 설득했다. 처음에는 내 이야기를 귀담아 듣는 듯 했다.그동안의 보다 나은 생계를 위해 최소한의 노력만을 했던 부분, 가족의 생활 수준 지탱을 위해서만 일했던 과거를 반성하는 듯 했다.

그러나,두번째 충분한 반성이 되질 못했다. 이를 충분히 이끌려고 노력했어야 했는데 그러지를 못했다. 그가 기존에 갖고 있던 (조직으로부터 사사받은)사고 체계를 버리게 하지는 못했다. 예를 들어, 조직에서 말하는 특정 업계의 시장의 원리(품질에 의해 가치가 정해지는 시장)가 모든 시장에 적용되지 못할 것임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분명 자신의 일상에서도 얼마나 ‘품질이 좋은가, 아닌가’에 따라 선택을 하고 있으며, 이를 구분할 만한 ‘정확한 눈(관점)’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최소한의 타협도 없었다. ‘그건 그거고,이건 이거’라는 답만이 돌아왔다.

세번째는 상호간의 기대 방향이 달랐다. Goal은 같았을 것이다. 기존의 조직으로부터 소외 당하는 존재감 없는 상태에서 벗어나, 자신이 정말로 몰입할 만한 가치가 있는 조직으로 옮기거나, 자신의 사업을 할 수 있는 상태로 변화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최종 목표만이 같았을 뿐, 그 상태가 되기 위해 얼마나 ‘적은 비용과 시간’을 들이는데 관심이 더 많았다. 이러한 성향을 우려하여 원하는 답을 당장에 내밀지 않은 것인데,그는 받아들이지 못했다. 참을성 있게 자신이 걸어왔던 길을 되짚어보고, 충분히 수양할 만한 마음의 여유를 갖지 못했다. 곧 이어 대학에 진학할 자식의 미래에 고추가루를 뿌릴 수 없는 그의 심정을 외면했던 것이 나의 네번째 패착이었다.

기대는 책임을 부른다.과거에는 분명 ‘특정 누군가에게 기대’했다. 그가 어느 정도는 해주겠지… 하고 말이다. 그러나, 머리가 굵어지고, 조직 및 사회 경험을 하면서 그 기대가 사람 보다는 그 사람과 나 사이의 관계에서 함께 ‘어떤 과정을 함께 밟아 원하는 결과를 얻는 것’에 초점을 맞추게 되었다.

누군가와 어떤 목적과 목표를 공유하고 해야 할 일을 무엇을 근거로 나누는가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을 깨우친 것이다. 이는 당장 그 사람에 기대 라기 보다는 그와 함께 밟아갈 과정과 결과에 대한 기대에 가깝다.

일과 사람을 분리하고, 조직의 합이 사람이 아니라 ,직무의 합이 될 수 밖에 없다는 말을 요즘에 다시금 새로운 의미로 깨우치는 중이다.역시 사람은 경험을 통해 성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