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인 코로나 바이러스 팬데믹 때문에, 다른 나라의 풍경은 접근 불가능한 비현실 같은 느낌이다. 이탈리아에서는 토요일 낮 12시면 모두 발코니로 나와 박수를 친다고 한다. 내 가슴이 다 뭉클하다. 이처럼 시간을 정해 의료진에게 일제히 박수를 보내는 나라는 유럽에서 이탈리아 뿐만이 아니다. 필자는 비록 아픈 사람을 돌보는 과가 아니지만, 목숨 걸고 진료하는 동료, 선후배 의사, 그리고 의료진들에 감사하고 응원한다. 대한민국에서, 의료진들이 어느 토요일 정오에 국민들의 박수세례를 받지는 못하더라도, 질책과 고발이라도 안 당하길 빈다

이탈리아의 피렌체 산타마리아 노벨라 역에 발을 내디디면 가장 먼저 듣게 되는 것이<The whole nine yards>라는 피아노 선율이었다. 영화 <냉정과 열정사이>의 주제 음악이다. 누가 틀어 놓은 것인지 두오모 성당까지 걷는 시내 거리에서도 이 음악이 울려 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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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추위를 많이 타는 편이다. 어렸을 때는 너무 말라서 더 그랬고 이제는 나잇살 때문에 좀 덜하기는 하지만, 아직도 4월엔 춥다. 반면에 더위는 별로 타지 않는다. 주위 사람들이 땀을 뻘뻘 흘릴 때에도 땀 한 방울 안 나기도 한다. S대 병원 인턴, 레지던트 시절, 필자는 동료에 비해 일을 열심히 안하는 것으로 오인받곤 했다. 동료 의사는 심전도 결과지 하나만 찾으러 갔다 와도 땀을 뻘뻘 흘려 수고 많다는 덕담을 듣는 반면, 필자는 심전도, 혈액검사, 엑스레이까지 세 군데를 들른 후 환자 치료까지 마쳐도 땀이 전혀 안 났다. 뺀질이 의사로 오인받기 쉬웠지만, 병원장이 수여하는 우수전공의 표창은 필자가 받았다. 땀 많이 난다고 상 주진 않는다. 베트남에 의료봉사를 갔을 때 같이 간 의료진들이 공항에 내리자 마자 고온 다습한 공기에 숨을 컥컥 막혀 괴로워했지만, 필자는 따뜻하고 좋았다. 추운 나라 공항에 내리면 괴로웠을 것이다.

며칠 전 아침, 병원에 출근해서 내 방에 들어오니 서늘했다. 서향으로 창문이 나 있어 오전 일조량이 적은 탓일 게다. 반사적으로 천장의 시스템 난방 에어컨을 키고 수술복으로 갈아입는데 살갗에 찬바람이 느껴졌다. 확인해 보니 하루 만에 난방이 냉방으로 바뀌어 있었다. 누군가 아침에 냉방 모드로 바꾼 것이다. 참고로, 시스템 냉난방 에어컨은 방 별로 다른 선택을 할 수 없고, 동시에 모든 방을 냉방, 또는 난방으로 통일해야 한다. 실외기를 공통으로 쓰기 때문이다. 춥다고 내 방만 몰래 난방버튼을 눌렀다가는 전체가 오류가 난다.

언젠가는 터닝포인트가 찾아온다.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면, 어느 순간에는 난방을 냉방으로 바꿔야한다. 그런데 ‘냉방과 난방 사이’가 단 하루라는 사실은 생각할수록 참 묘한 일이다. 갑작스럽다는 것은 늘 떨린다. 갑작스러운 여행, 갑자기 찾아온 사랑은 설레지만, 갑작스러운 이별, 발병, 갑작스런 사고는 끔찍하다.

어제 추워서 난방을 켰던 필자가 오늘 갑자기 더울 리는 없으니, 찬바람을 뿜는 에어컨은 쓸모가 없다. 그래서 항상 필자의 방에는 전기 온열기가 대기 중이다. 지금도 따뜻하게 전열기의 복사열을 느끼며 이 글을 쓰고 있다. 저 온열기는 1년 내내 그 자리에 있고, 6월 중에도 가끔 쓸모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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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출입이나 광대뼈, 사각턱수술을 하러 찾아온 환자들로부터, 어느 계절에 수술하는 것이 제일 좋냐는 질문, 더운 여름에는 수술하면 안 좋냐는 질문을 적지 않게 받는다.

여름에 수술하면 안 좋다는 속설은 사실무근이다. 21세기에는 그렇다.

영국의 미생물학자 알렉산더 플레밍은 1928년경, 포도상구균이 푸른곰팡이 주위에서는 증식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고, 약 10년 후 이를 바탕으로 영국 옥스퍼드 대학의 병리학 교수였던 하워드 월터 플로리와, 화학병리학 강사였던 에른스트 보리스 체인이 페니실린을 정제하여 항생제로 개발하게 되고, 세 사람은 1945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공동 수상하게 된다.

이 페니실린이라는 항생제가 첫 출연하기 이전의 1차 세계대전에서는, 여름에 입은 총상이 더 안 나았을 것이다. 더운 곳에서는 음식도 잘 상하듯이, 세균이 증식하기 쉬운 환경이 되었을 것이다. 한 여름 더위에 땀도 많이 나고 위생상태도 더 나빴을 것이다. 다친 살은 고름이 나오고 대책 없이 푹푹 썩어들어 갔을 법하다.

그러나, 수백종류의 항생제가 있는 것은 물론이고, 사실상 여름에도 에어컨이 어디에나 있고, 한 여름에도 실내에 들어가면 (필자 기준에서는) 춥기도 한 요즘 세상에, 여름에 수술을 하면 덧나기 쉽다는 것은 아무 근거가 없다. 덧나는 것보다 냉방병을 조심해야 할 판이다.

그러므로, 더울 때보다 추울 때 더 돌출입수술 등의 성형수술을 받기 좋다는 것은 사실 감염이나 염증이 적어서가 아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성형외과가 겨울이 더 바쁘다고 한다. 그 이유는 대체로 다음과 같다.

첫째, 겨울방학이 길어서다. 성형수술을 원하는 분들은 충분한 회복기를 거쳐 수술의 자연스러운 결과가 나온 다음 학교나 사회생활을 하고 싶어 한다.

둘째, 가리기 편해서다. 대부분 성형수술은 얼굴에 집중되어 있으므로, 수술 후 급성 붓기가 있을 때, 모자나 마스크, 선글라스, 스카프, 목도리, 옷깃 등으로 얼굴부위를 가리고 싶어 한다. 여름보다 겨울이 더 두툼한 복장으로 얼굴을 가리기 편하다.

셋째, 새 학기가 3월에 시작하기 때문이다. 특히 수능을 보고나서 대학입학을 앞둔 예비 대학신입생들이나, 휴학 후 복학을 앞둔 학생, 3월에 새 학년이 되기 전에 수술을 받고 싶은 학생들, 그리고 자녀의 새 학기가 시작되면 같이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지는 학부모들도 본인들의 수술을 위해 새 학기가 시작되기 전의 겨울방학 기간을 선호한다. 일단 학기가 시작된 봄에는 성형수술을 원하는 환자들이 1년 중 가장 적다.

넷째, 생활 패턴, 근무패턴의 변화 때문이다. 소위 워라밸(work-life balance)을 중요시하게 된 젊은 세대들은, 여름휴가를 온전히 여행 등으로 즐기는데 쓴다. 성형수술은 따로 월차, 연차 내서 나중에 하겠다는 거다. 회사 눈치 안보고 쉴 수 있는 권리를 누릴 수 있는 사회니 가능한 일이다. 이처럼, 여름휴가에 성형수술을 하는 사람은 나날이 줄어서, 과거에 여름과 겨울이 성형외과의 성수기라는 속설은 철지난 이야기가 되어가고 있다. 여름에는 환자가 놀러가고 없으니, 아예 병원 비우고 놀러가는 성형외과 원장들도 있다.

그런데 잘 생각해보면 여기에 하나의 틈새 전략이 있을 수도 있다.

어느 환자든 자신의 얼굴을 온전히 맡길 집도의의 그 날 컨디션이 궁금할 것이다. 돌출입수술을 앞둔 환자가 짐짓 필자의 안색을 살피는 것이 보이곤 한다. 의사가 전날 과음한 것은 아닌지, 잠을 설친 것은 아닌지, 감기기운이 있어서 컨디션이 나쁜 것은 아닌지 궁금할 수 있다. 수술 당일 예민해진 환자는 11시간 꿀잠 잔 필자에게, 피곤해 보이신다면서 살짝 떠보기도 한다. 환자 입장에서는, 수술을 집도하는 의사의 컨디션이 수술의 안전성과 결과를 조금이나마 좌우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필자도 사람인지라 컨디션의 변화가 물론 있다. 몸살 끼가 있는 날도 있다.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해 요즘은 모임자체가 사라졌지만, 평소 모임도 있을 것이고, 술도 가끔 먹을 수 있다. 두통이 있는 날도 있고 허리가 아픈 날도 있다. 그런 조그만 차이가 과연 필자의 돌출입수술에 영향을 미칠까? 필자의 생각에 그렇지 않다. 몸이 무겁다고 손이 무거워지지는 않는다. 돌출입수술은 필자에게는 컨디션 영향을 받기에는 너무 익숙하고 금방 끝나는 수술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적절한 휴식이 필자 자신을 위해서, 또한 환자를 위해서 필요한 것은 사실이며, 환자의 수술을 앞두고 최상의 몸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필자를 신뢰하는 환자에 대한 예의이기도 하다. 그렇게 본다면, 겨울보다 수술이 상대적으로 더 적은 봄, 여름에 돌출입수술, 광대뼈, 사각턱수술을 받는 환자들이, 더 많이 휴식한 필자로부터 수술을 받는 셈이다. 아이러니한 일이다.

영화 냉정과 열정사이의 남자 주인공 준세이의 직업은 피렌체의 유화 복원사이다.

"복원사라고 하는 건 죽어가기 시작한 생명을 다시 되살리는, 잃어버린 시간을 되돌릴 수 있는 유일한 직업이라고 생각해요." 영화 속 대사다. 성형외과 역시 인체의 손상을 복원하는데서 출발한 학문이다.

인간은 누구나 냉정과 열정 사이를 오가며 산다. 이 순간에도 몸과 마음, 결혼과 연애, 설렘과 권태, 도전과 안주 사이에서 고민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 의사로서 필자가 생명을 되살리는 일을 하고 있지는 않지만, 숨어있는 아름다움에 생명을 불어넣는 일에는 열정이 식지 않는다. 사라지기 직전의 돌출입과 광대뼈, 사각턱을 만나러 수술장으로 걸어 들어갈 때 아직도 설렌다.

성형외과 의사가 의느님으로 불리기도 하지만, 사실 필자는 아름다움을 창조해내는 것이 아니고, 숨어있는 아름다움을 복원해내는 것이다. 당신의 아름다움은 당신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