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적 부족주의> 에이미 추아 지음, 김승진 옮김, 부키 펴냄.

인간은 집단에 속하려고 한다. 집단 본능(group instinct)이다. 집단의 단위가 부족이므로 부족 본능으로도 부른다. 부족의 원초적인 정체성이 명확히 드러나는 곳은 인종, 민족, 지역, 종교, 분파 등에서다. 부족은 소속 집단의 이익을 맹렬히 추구한다. 동시에 부족은 외부인을 위협으로 간주한다. 부족이 갖는 배제 본능이다.

이러한 부족적 동학(動學)은 필연적으로 정치에 상당한 영향력을 갖는다. 저자가 말하는 정치적 부족주의(political tribe)이다. 정치적 부족주의의 위력을 알려면, 이것을 간과한 대가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돌이켜 보면 된다.

◇베트남전은 부족전쟁이었다=우리는 세계를 자본주의 對 공산주의, 민주주의 대 권위주의, 자유세계 대 악의 축 등 이데올로기에 따라 대립하는 장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문제는 이데올로기를 덧씌운 렌즈로 세상을 보면, 정치적 격동의 주요인인 ‘집단 정체성’들을 놓친다. 그로 인하여 벌어진 현상들을 제대로 해석할 도리가 없다.

미국을 비롯한 서방은 베트남 사람들이 ‘사악한’ 공산주의에 맞서 싸운다고 판단해 참전했다. 그러나, 베트남은 이념과 무관하게 그저 화교로부터 민족을 지키고 싶어했다. 베트남 사람들은 남과 북 가릴 것 없이 화교를 증오하고 있었다. 인구 비중은 1%인데도 베트남 화교는 경제적 부의 70~80%를 장악했다.

그런데, 미국 참전으로 베트남인과 화교간 빈부격차가 더 벌어졌다. 미국이 전쟁기간에 투입한 1000억달러는 대부분 화교의 호주머니에 들어갔다. 미국 원조를 통한 수입 물품의 60%를 화교가 거래했다. 암시장도 화교가 장악하고 있었다. 화교들은 뇌물을 써서 징병마저 회피했다. 미국이 자본주의 체제를 도입하자 화교는 더욱 부유하게 됐다. 남베트남의 은행 32개중 28개가 화교 소유가 됐다. 부족주의를 이해 못한 미국 개입으로 베트남인들은 화교를 부유하게 만들기 위해 서로 죽고 죽여야 하는 상황이 됐다. 갈수록 미국에 대한 적대감이 커졌고, 미국은 패배했다.

◇트럼프 대선 승리=미국 사회는 두 개의 백인 부족으로 분열되어 있다. 첫 번째는 도시·연안 지역에 사는 고학력 백인 엘리트 계층이다. 이들은 자신이 ‘부족적’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들의 ‘코즈모폴리턴주의’는 외부인들과 차별화되는 배타적인 부족적 표식이다. 이들에게 ‘외부인’이란 USA를 연호하는 촌뜨기들이다.

두 번째는 농촌·중서부·노동자 계급이다. 교육 수준이 낮고, 인종주의적이며, 애국적이다. 이들의 표식은 버드와이저, 성조기,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같은 구호, 애국심 등이다. 이들은 자신이 가져야 할 부를 엘리트 백인 계급이 독차지하고 있고, 입으로는 ‘정치적 올바름’을 주장하면서도 실제로는 ‘기회 사재기’와 ‘유리 바닥’을 통해 기득권을 가로챘다고 경멸한다.

이런 생각이 노동자계급에 강력한 부족적 정체성을 형성했다. 2016년 트럼프 당선은 이 같은 두 번째 백인 부족의 ‘反기득권 정체성’에 힘입었다. 좌우파의 대결이나, 흑백 인종주의와는 거리가 멀었다.

◇부족주의 무시한 이라크전=서방사회는 민주주의가 통합을 불러온다고 믿는다. 하지만 민주주의가 집단 간 분쟁과 갈등을 일으킬 수도 있다. 인종, 민족, 분파 간 분열로 불평등이 존재하는 상황에서는 그러하다. 미국 등 서방은 이라크를 침공하면서 “민주주의가 이라크 사람들에게 영구적인 평화를 가져올 것”이라고 낙관했다. 하지만, 사담 후세인과 집권당은 수니파였고, 국민의 60%는 시아파였다. 민주적 선거 결과 이라크는 더욱 혼란에 빠졌다. 시아파 정부가 수니파에 보복을 가하는 상황이 초래됐다. 이라크에서 민주주의가 아니라 ISIS가 생겨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