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의 기억> 이태호 지음, 어바웃어북 펴냄.

저자는 한국 자본시장 100년사에서 벌어진 대형 사건들을 분석하고, 그 속에 새겨진 경제위기의 패턴을 도출했다. 자본시장의 역사는 놀라울 정도로 비슷하게 반복되고 있다. 저자는 그 이유를 ‘기억의 상실’ 때문으로 본다. 그는 “기억의 상실은 실수의 반복을 낳고 진전을 가로막는다. 자본시장을 도박판으로 받아들이는 일부의 인식은 100년 전의 쌀 선물 거래나 반세기 전 채권파동 때와 달라진 게 없다”고 지적한다.

책에는 일제강점기 쌀 선물시장의 흥망부터 2020년 3월 기준금리 0%대 인하에 이르기까지, 거대 파장과 후유증을 낳은 주식·채권·외환시장의 33장면이 다뤄져 있다. 국가 기록, 개개인의 증언, 기업들의 사사, 통계 자료 등을 토대로 재구성한 33장면 안에는 GDP, 물가 등 거시경제적 변화뿐 아니라 투자와 관련한 인간의 심리, 정치와 사회적 변화, 기술적 진보의 영향까지 담겨있다.

이 책은 앉아서 책 한 권 뚝딱 만들어내는 언론계 일각의 큐레이션식 저작 풍조에서 벗어나 있다. 주관적 해석이 아니라 객관적 통계와 수치를 기초로 평가하려는 데이터 저널리즘의 자세가 확고하며, 이를 위해 땀 흘린 흔적이 역력하다. “짧은 문단일지라도 정확성과 객관성을 뒷받침하려면 그보다 수십 배 많은 자료들을 이해해야 했다”는 말은 고지식할 정도로 완벽성을 추구해본 자만이 공감되는 대목일 것이다. 서사적 묘사로 재밌게 읽히기도 한다. 일독을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