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12시가 넘어 유튜브가 링크된 문자 하나가 왔다.

서울대 정현채 교수가 강의한 죽음에 관한 강의내용이었다.

“죽음에 관해 어떻게 성찰해야 하는지 생각해 보게 하는 내용“이라면서.

“죽음은 소멸인가, 옮겨감인가”라는 주제인데

죽음은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이며

육체는 소멸되지만 의식체는 이동해서 영속한다는 내용이다.

#어제 받은 또 다른 문자 하나.

“하루하루를 넘기기가 너무 힘들어요.”

출근은 하지만 모든 게 멈춰서 책상에만 앉아있으니

답답해서 미칠 지경이라는 것이다.

 

바로 이날, 신문에는 자가 격리자에게 전자팔찌를 채우겠다는 정부의 방침이 보도됐다. 며칠 전에는 사회적 거리두기를 2주간 더 연장한다는 발표도 있었다.

아주 오래 전, 영화 제목이나 구체적인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한 장면이 유독 기억에 남는다. 한 범죄자가 구속됐다. 형기를 마치고 나오자마자 교도소 입구에서 다른 범죄혐의로 다시 구속됐다. 그리고 또다시 형기가 끝나고 나오는 길목에서 또 다른 혐의를 씌워 구속영장을 발부했다.

연거푸 세 번의 구속 상황이 되자, 그는 그 자리에서 모든 걸 포기하고 털썩 주저앉는다. 그의 심정은 나오지 않았지만 그 표정을 통해 알 수 있었다. 첫 번째 구속에서는 희망을 가진 눈빛이었고, 두 번째 구속에서는 허무감이 묻어났다. 그러나 세 번째 구속에 이르자 그의 동공은 빛을 잃고 움직임을 멈춰버렸다.

영화는 반복적인 강제가 가져오는 정신적 피폐가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보여주었다. 같은 행위라도 자발적인 행위와 강제적 격리는 그 차이가 현격하다. 전자는 스스로 지킨다는 자부심이 있지만 후자는 심각한 고통으로 다가온다. 고통이 반복되면 우울감이 찾아오고, 우울감이 증폭되면 모든 걸 포기할 수도 있다.

이제 사회적 거리두기도 자발적 참여로 풀어둬야 할 시점으로 보인다. 언급한 두 문자에서도 간접적으로 보여주지만 더 이상 강제하면 그 이상의 대가를 치를 수도 있을 것이다. 더군다나 자가 격리자에게 전자팔찌까지 채운다면 그건 상상조차 하기 어려울 정도로 정신적 폐해는 심각해 질수 있다. 제발 전자팔찌만은 도입하지 말자. 시민의 이성에 호소하고, 자발적 참여로 이끌어가야 한다.

전자팔찌가 아니라도 자가격리자들의 심리적 압박감은 상상 이상일 것이다. 오죽하면 14일 중 하루를 남기고 밖으로 나갔다가 ‘1년 이하의 징역이나 1천만원 이하의 벌금’을 받는 청년이 나오겠는가. 단순히 사회적 거리두기만으로도 피로감이 쌓여 우울증을 호소하는 사람이 많은데 거기에다 전자팔찌까지 채운다면 아마 견디기 어려운 자괴감이 몰려올 것이다. 성범죄자도 아니지 않는가.

‘사회적 거리두기’라는 말도 거슬린다. ‘사회적’이라는 행간의 의미는 ‘함께 함으로서 이로운’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런데 서로를 위해서 거리를 두라는 말이니 얼마나 이율배반적인가. 굳이 거리두기를 이어가야 할 상황이라면 차라리 물리적 거리두기라고 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그렇잖아도 ‘사회적’이라는 말에 경기를 일으키는 사람들도 많다. 지금은 대의를 위해 누구도 나타내고 있지 않을 뿐이다.

이제 가만히 놔둬도 시민들은 자발적으로 거리를 두고, 자발적으로 격리하며, 자발적으로 검사를 받을 만큼 성숙해졌다고 생각한다. 이 정도면 충분한 학습효과도 있을 것이고, 공동체가 아니라 스스로를 위해서도 그렇게 할 것이다. 자꾸 강제하면 국민은 오히려 ‘스탠포드 감옥실험’을 떠올리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지금 우리는 대한민국 국민의 우수성을 세계에 알릴 절호의 기회를 맞고 있다. 만일 이제부터라도 국민의 자발성에 맡겨둔다면 전 세계적으로 우수한 코로나 극복 사례로 평가될 것이다. 얼마 전, WHO로부터 대한민국 대통령이 세계보건총회에서 아시아 대표로 발언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자랑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소망컨대, 나중에는 자발적 시민의식으로 코로나를 극복했다고 유엔이 우리나라의 ‘국민 대표’를 초청해서 기조연설을 요청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