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10여년 전 쯤 일이었던 것 같다. 평상시와 같이 경영전략 과목 수업을 마치고 교탁을 정리하고 있는데 한 학부 학생이 다가와서 유명인이 사인한 책을 건네면서 “교수님, 제가 존경하는 모 그룹의 모 회장님이 직접 사인해 주신 책입니다. 한 권을 더 받았으니 교수님께서도 읽어보시면 경영전략 수업에 많은 도움이 되실 겁니다” 하는 것이었다. 당시 대학생들 사이에서 사회 저명인사들을 초청하는 토크콘서트가 폭발적으로 인기를 끌었었고 특히 모 회장님의 경우는 샐러리맨 신화를 일으킨 CEO로 강연계에서 팬덤을 일으킨 분이었다. 당시 신임교수였던 나로써는 논문 쓰기에 정신 없던 시절이어서 그 학생에게는 미안하지만 다른 분이 쓴 자서전을 읽기에는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었다.

그로부터 몇 개월 지난 후 한 사석에서 방금 언급되었던 샐러리맨 신화인 모 그룹의 모 회장님에 대한 얘기를 또 듣게 되었다. 그 분의 토크콘서트를 다녀 온 한 지인의 이야기였는데 강연장을 들었다 놨다 할 정도로 감동의 도가니였다는 것이었다. 문득 예전에 제자가 준 그 분의 자서전이 생각이 나서 책장 구석에 꼽아 두었던 그 책을 꺼내서 다시 읽어 보았다. 어느 정도 읽어 가던 중 내 마음 한 구석에서 불쑥 불경스런 생각이 들었다. 내 머릿속을 바로 스쳐갔던 생각은 “이 회사 어떡하지?” 였다. 어쩌면 기업과 경영자를 연구하는 것이 업(業)인 나에게는 일반인들보다 좀 더 비판적이고 다른 반응을 보일 수도 있다는 생각은 충분히 들었다. 놀랍게도 우려가 현실이 되어 버린 것이, 얼마 지나지 않아 그 기업은 유동성 위기로 법정관리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렇다면 그 훌륭한 회장님의 그 기업은 왜 한 순간에 실패하게 되었을까? 왜 나는 그 회장님의 성공신화를 접하던 순간 불길한 예감이 들었을까? 한가지 다행한 점은 이 복잡다단한 수수께끼를 한 단어로 풀 수 있다는 것이다. 바로 ‘휴브리스(Hubris)’이다. 휴브리스는 그리스어로 ‘자만 혹은 자부심이 큰 인간이, 신(神)을 화나게 해 신의 영역에 도전해 몰락을 자초하는 경우’를 뜻한다. 최근 경영전략 학계에서 화두가 되고 있는 주제인데 한가지 재미있는 점은 휴브리스는 실패하고 있는 기업에게서 나오는 특성이 아닌 성공의 가도를 달리는 기업에게서 유독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는 마치 창공을 향해 비상(飛上)하는 이카루스가 태양 가까이 날자 밀랍이 녹아 날개가 떨어져 나가는 것처럼, 어느 구간까지는 성공적으로 보이는 일들이 한 순간에 좌절될 때, 그 배경에는 휴브리스가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성공한 기업에게는 성공한 CEO가 있다. 그러나 이 성공한 CEO가 지속가능한 성공으로 이끌려면 바로 ‘휴브리스’라는 치명적인 유혹에서 벗어나야 한다. 성공한 CEO에게는 ‘자신감’이 뒤따른다. 하지만 그 ‘자신감’이 ‘휴브리스’로 변질 되었을 때 그때부터 문제가 시작된다. 1986년 UCLA 대학의 리차드 롤 교수는 기업 간 인수합병이 실패한 주요 원인을 최고경영자의 휴브리스로 꼽았다. 구체적으로 코넬대학의 매튜 헤이워드와 도널드 햄브릭 경영학과 교수는 1989년부터 1992년까지 1억 달러 이상의 돈이 오고 간 M&A 106건을 분석한 결과, 기업의 최근 성과가 좋을수록, 최고경영자에 대한 언론의 찬사가 쏟아지게 되고, 그 최고경영자는 거액의 돈을 주고 기업을 인수하게 된다고 하였다. 궁극적으로 시장가격보다 높게 책정된 가격으로 인수한 기업은 재무적 위기를 맞게 되고 기업의 실패로 이어지게 된다고 한다. 한가지 놀라운 사실은, 위에서 언급했던 국내 모 그룹의 법정관리 문제도 무리한 인수합병으로 시작된 일련의 사건이었다.    

실패한 기업의 CEO들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휴브리스’를 피하기 위해선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조건이 따른다. 첫째, ‘나르시즘’에서부터 벗어나야 한다. 호숫가에 비친 자신의 멋진 모습에 반해서 물에 빠져 죽은 그리스 신화의 나르시스처럼 성공신화에 도취하게 되면 기업경영에 있어서 현실감각을 잃게 된다. 앞에서 언급된 모 기업 CEO의 자서전을 읽는 내내 우려했던 점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성공적인 사업전략→경쟁력 강화, 수익성 향상→경영자 자신이 최고라고 믿기 시작→외부적으로 자만 표출→혁신성 억제→현실 안주 상태로의 진입→기업의 몰락. 영국의 로얄 홀러웨이대학의 데니스 투리시 교수는 “리더들은 자신이 모든 해답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바로 모 기업 회장님은 자서전 내내 모든 해답을 가진 분처럼 보여졌다.

둘째, ‘경청’해야 한다. 경청하지 않는 CEO는 자신과 반대되는 의견을 듣기 싫어하며 자신이 먼저 말하는 것을 즐긴다. 토크콘서트나 경영콘서트 같은 자리는 이런 분들에게 최적의 놀이터다. ‘라떼는 말이야’로 시작하는 훈화 말씀은 부하직원들로 하여금 입을 닫게 만들고 좋은 아이디어의 싹을 조기에 자르게 만든다. 1895년 미국 시카고에서 설립된 슈윈(Schwinn)이란 자전거 제조업체는 1970년대 산악자전거 시장 진출에 대한 직원들의 제안을 무시하고 기존 자전거 시장에 매진하였다. 창업자의 후손인 에드워드 슈윈 CEO는 “우리는 자전거를 매우 잘 안다. 산악자전거 제조업체들은 모두 아마추어”라며 새로운 사업모델에 대한 의견을 배제했다. 이후에 산악자전거는 자전거 제조 업계의 대세 업종이 되었고 1990년대 초반 100년 기업 슈윈은 파산하게 되었다.

셋째, ‘겸양(謙讓)’의 미덕을 갖춰야 한다. 겸양은 휴브리스와 반대되는 개념이다. 성공한 CEO들에게 겸양을 찾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한가지 오해하기 쉬운 점은 겸양을 겸비한다는 것은 자아가 절대 부족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내실이 있는 인격일수록 겸손할 수 있다는 심리학적 분석이 있다. 2014년 12월에 발생한 대한항공의 땅콩회항 사건을 반추해 보면 조현아 전 부사장이 좀 더 겸양의 미덕을 갖추었다면 이렇게 파급효과가 크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오만은 패망의 선봉이고 자만은 넘어짐의 앞잡이’란 말이 있듯이 대한항공에게는 순간의 휴브리스가 큰 대가를 치뤄야 하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기업이 실패하는 요인은 여러가지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가장 결정적인 원인을 뽑으라면 경영자의 ‘휴브리스’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어쩌면 ‘휴브리스 인덱스(Hubris index)’와 같은 새로운 평가시스템이 대한민국 경영자들에게 당장 도입되어야 하는 것은 아닐지 조심스럽게 제안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