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의사 앞에 앉았다.

의사가 “담배 피우세요?”라고 묻는다. 당신은 “아니오”라고 대답하지만, 의사는 그 순간 ‘no’ 혹은 ‘안 핌’이라고 기록하지 않는다. 대신 이렇게 적는다.

‘smoking : denied’

즉, ‘부인했다’ 라는 뜻이다. 이것은 사실, 환자가 담배를 피우는 사실을 숨기고 있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둔 것이다.

필자가 S대학 병원 소아응급실에 인턴으로 있을 때의 일이다. 발등에 압궤손상(crush injury; 눌려 으스러지는 손상)을 입은 꼬마가 왔다. 환자 보호자는, 간판이 떨어져 발등을 다쳤다고 했다. 우는 아이를 달래가며 발등을 시진(視診)하고 소독했다. 직감적으로 교통사고 같았다. 손상의 양상, 폭과 정도에서 소위 촉이 왔다. 간판이 꼬마의 발등에 딱 맞추어 떨어질 확률도 로또보다 희박해 보였다. 보호자에게 교통사고가 아니냐고 재차 물었지만 아니라고 했다. 차트에는 이렇게 썼다

‘TA : denied’

TA는 사실 당시 병원에서 통용되던 콩글리시다. (교통사고를 직역한 traffic accident의 약자인데, 사실은 car accident가 맞다.) 일단 알겠다고 하면서 정맥주사를 잡고 필요한 응급처치를 했다. 그 이후 다시 한번 넌지시 그러나 명확한 어조로 물었다. “간판이 떨어진 게 맞나요?” 보호자는 당황하며 실토했다. 사실은 교통사고라면서 눈시울이 글썽였다.

교통사고를 굳이 간판에 의한 사고로 ‘위장’하려던 이유는, 당시에는 S대학병원 응급실에서 자동차보험 적용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꼬마의 보호자는 교통사고는 S대학 병원에서 보험적용이 안 되는 걸 이미 알고 있었지만, 다친 자녀로 하여금 최선의 치료를 받게 하고 싶은 마음에 간판에 깔렸다고 거짓말을 하게 된 것이다.

코로나 바이러스의 지역사회 감염이 심각하다. 서울의 모 대학병원을 방문해 진료를 받으면서, 특정 지역에서 상경한 사실을 숨기다가 코로나 바이러스 확진자로 판명된 사건이 있다. 응급실이 폐쇄되고 접촉한 의료진도 자가격리에 들어갔다. 아마 그 환자에게 그 지역 방문사실을 문진(問診)했다면 차트에는 이렇게 썼을 것이다.

‘A지역 방문여부 : denied’

의사는 당신의 말을 다 믿지 않는다. 담배를 정말 안 피운다거나, 교통사고가 정말 아니라거나, 특정 지역 방문을 정말 안 했다는 확증이 없는 상태이므로 환자가 ‘아니라고 말했다’, 즉 ‘부인했다’는 사실만 적는 것이다.

의사는 왜 환자 말을 믿지 못할까? 거창하지만 결국 환자를 위해서다.

환자가 숨기는 사실이 있을 수도 있다는 가정 하에 모든 진단의 가능성을 열어놓아야 환자의 질병을 놓치지 않기 때문이다.

한편, 역설적이지만 의사와 환자만큼 서로를 잘 믿는 관계도 없다. 왜냐하면 기본적으로 환자가 건강해지는데 도움이 될 사실들을 숨길 리 없다는 전제와 상호 신뢰 하에 환자를 보기 때문이다. 평소 기록한 혈당 수치를 정상인 것처럼 거짓 작성해가는 어리석은 당뇨병 환자는 존재하기 어렵다. 자기 손해일 뿐이다. 정직하게 기록해서 더 알맞은 약 처방을 받아야 건강해진다. 위의 몇 가지 예에서도, ‘부인했다’고 써놓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환자가 거짓말을 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전제하에 환자를 진료한다. 의사는 거짓말을 추궁하는 검사나 형사가 아니다. 아픈 환자를 도와주기 위해 존재한다.

젊은 시절, 대학에 재건수술을 주로 하는 교수요원으로도 잠깐 있기는 했지만, 필자는 지금은 미용적인 목적의 성형수술, 그것도 얼굴뼈와 돌출입수술만 주로 하며 살고 있다. 성형외과를 찾는 환자들은 사실 환자도 아니고 건강한 사람들이다. 아픈 곳 하나 없고 오직 외모를 더 개선하기 위해 찾아온다. 물론 특징적인 외모나 심한 돌출입 때문에 아팠던 마음의 상처를 수술을 통해 치유해줄 수 있는 건 덤이다.

환자가 하는 거짓말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첫째, 환자가 과거의 성형수술을 숨기는 것이다. 과거에 수술한 이력을 자세히 말해주면 더 적절한 수술을 받을 수 있을 텐데 왜 그럴까? 같은 부위의 재수술인 경우, 수술비가 더 올라간다는 이야기를 어디선가 들어서다. 물론 환자가 무심코 말 안했을 수도 있고, 수술 전 엑스레이에서 기존 수술이 드러나기도 하지만, 여하튼 수술을 한 번 했던 뼈 부위를 다시 절개하고 들어가 수술하는 것은 조금 더 난이도가 높은 게 사실이다. 상처살 때문에 시야도 나쁘고, 기존 수술의 불충분하거나 과도하거나 부적절한 결과도 필자가 떠안고 극복해가며 수술해야 하기 때문이다. 재수술비를 절약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환자의 정확한 수술이력과 현재 상태를 제대로 파악해서 일생의 마지막 뼈수술로 완성해주는 것이다.

둘째, 이런 거짓말은 애교 수준이긴 하지만, 가명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꽤 있다. 사실 의료보험 적용이 되지 않는 미용 성형수술이기 때문에, 본인의 신분증을 확인하거나 보험 정상 가입여부를 확인해야 할 필요가 사실상 없다.

그래서 가끔 이런 일이 생긴다. B라는 환자가 찾아와, “전에 승희 언니라고, 친한 언니가 여기서 돌출입 수술을 해서 정말 여신이 되었거든요. 그 언니 보고 왔어요.” 필자가 수술을 한 환자가 여신급이 되었다니 기쁘고 반가운 마음에 차트를 검색해보지만 환자가 말한 이름은 없다. “승희란 이름이 진짜 이름인가요?” 라고 물으면 “글쎄요. 진짜 이름 아닌가?”하는 대답이 나오곤 한다.

우연한 기회에 바로 그 여신급이 되었다는 환자가 이번에는 광대뼈수술을 받고 싶다면서 병원을 찾아온다. 우리 병원에서 알고 있는 그녀의 이름은 황숙경(가명)이다. 최근 자기소개로 온 동생 B가 필자에게 돌출입수술 받았을 거라고 한다.

-아, 혹시 그 동생 B양이 숙경씨를 승희씨로 알고 있나요?

환자가 웃으며 말한다.

-숙경도 승희도 다 가명이에요.

그러니까, 우리 병원에서 알고 있는 황숙경 역시 본명이 아니었던 거다. 왜 가명을 쓰냐고 물으면, 답은 모두 비슷하다. 수술한 사실을 병원 기록에 남기고 싶지 않아서.

셋째, 특히 돌출입수술을 한 환자가 지인들에게 하는 가장 흔한 거짓말은, 다름 아닌 ‘나 교정했어’ 혹은 ‘살 빠졌어’ 이다.

돌출입수술은 말 그대로 드라마틱한 변화가 생긴다. 돌출된 입 하나 바뀌는데 사람이 그렇게 바뀐다는 것이 잘 안 믿길지도 모르지만, 실제로 여권, 주민등록증 사진을 바꾸어야 한다거나 늘 보던 학교 친구들이 몰라보고 그냥 지나치는 경우, 부부 동반하여 결혼식장 하객으로 갔는데 옆에 서있는 아내를 몰라보고 와이프는 같이 안 왔냐는 질문을 받는 웃지 못할 에피소드가 생긴다. 결혼 석달 전 돌출입 수술을 받은 신부와 청첩장을 돌리는 식사자리에서, 오래 만난 여친이 아닌 뉴페이스와 결혼하는 것으로 오해받은 경우도 있었다. 인도에 사는 부부 중 아내가 돌출입 수술을 받고 몇 주 만에 인도로 돌아갔는데, 공항에서 남편이 자신을 못 찾는 게 너무 웃겼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이렇게 몰라볼 정도의 얼굴로 변하는 것이 오히려 역설적으로 자신이 돌출입수술을 했다는 걸 숨기게 되는 이유가 된다. 평생 비밀로 하고 싶은 것이다. 수술로 혹은 재력으로 확 바뀌었다는 것을 인정하면 좀 너무한 느낌, 반칙을 쓴 것 같은 느낌일지도 모른다. 때마침, 수술 후 마무리교정 장치가 치아에 붙어있으면 교정해서 달라진 거라고 둘러대기에 딱 좋다. 본인만 입 다물면, 지인들은 수술로 입을 넣었으리란 상상조차 못한다. 돌출입이 들어가고 나면, ‘코수술 했구나?’ 라는 이야기도 듣는다고 한다. 그럼 그냥 그렇다고 얼버무리고 넘어가기도 한다.

더 흔한 쌍꺼풀 수술의 경우와 비교해보면 완전히 딴판이다. 쌍꺼풀 수술은 첫째, 누구나 쌍꺼풀수술의 존재를 알고 있고 둘째, 쌍꺼풀 수술을 한다는 것이 허물이 되지 않을 만큼 보편적이며 셋째, 수술을 해서 없던 쌍꺼풀이 생기면 주위 사람들이 모두 다 그걸 보고 수술사실을 알게 된다. 즉, 숨길 필요도 없고, 숨길 수도 없다. 돌출입수술은 첫째, 입을 넣는 수술이 있다는 것을 (의사조차도 가끔) 잘 모르고 둘째, 흔한 수술이 아닌 돌출입수술을 통해 몰라보게 아름다워지고 나면 수술 사실을 숨기고 싶어 하며 셋째, 돌출입 수술 후에 주위 사람들이 무슨 수술을 했는지 짐작을 못 한다. 그러니, 굳이 자신이 돌출입수술로 예뻐졌다고 고백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필자는 억울하다. 열심히 돌출입수술로 아름다움을 만들어내도, 공(功)은 치과나, 다이어트한 환자 자신이나, 하지도 않은 코수술로 돌아간다. 쌍꺼풀 수술은 남의 눈에 보이므로, 잘됐다고 소개로 줄이어 오는 환자군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돌출입수술은 (가족이나 절친 아니고서는) 소개를 해주지 않는다. 평생 비밀인 거다. 아무리 아름다워도, 돌출입수술한 사람 얼굴만 보고 필자를 찾아오기도 힘들다. 쌍꺼풀과 달리 무슨 수술을 했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돌출입수술 잘되면, 주위에 많이 홍보해드릴게요’ 하는 환자의 말에도 필자는 이제 그냥 씨익 웃는다.

돌출입수술 하러 오는 환자들이 마스크를 쓰고 있다. 필자도 마스크를 항상 쓰고 진료한다. 생각하고 싶지도 않지만 마스크를 모든 사람이 평생 언제 어디서나 쓰고 사는 세상이 된다면 돌출입수술은 불필요할 것이다. 마스크를 벗어야 돌출입이든 예쁜 입이든 보인다. 병원에서 체온측정과 호흡기 질환 관련 문진을 요즘처럼 철저히 한 적은 없었다. 환자가 마스크 잠깐 벗은 동안 침묵의 돌출입 진찰을 끝내면, 바로 마스크를 다시 쓰도록 한다. 의사는 당신을 믿고 싶다. 신뢰는 인간의 선한 본능이다. 그런데, 바이러스가 불신의 세상을 만들고 있다.

사회적 거리두기가 한없이 길어지니 이러다 마음이 병들 것 같다. 벽이나 식물에 말을 거는 것까지는 정상이고, 벽이 대답을 하거든 정신과 상담을 받아보라는 우스갯소리도 나온다. 주말에 한강 시민 공원을 찾으니, 답답증에 지친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꽃망울은 터지는데, 봄이 설레지 않는다.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다.

새로운 바이러스를 이겨내거나, 혹은 건강하게 공존하는 그 날이 올 때까지, ‘일단 멈춤’으로 괴로운 몸도 마음도 살뜰히 챙기시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