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믹리뷰=장영일 기자] 한국은행이 시중에 유동성을 공급하기 위해 무제한으로 금융사의 환매조건부채권(RP) 매입에 나선다. 이는 글로벌 금융위기나 외환위기(IMF) 때도 없었던 조치로 이전 위기보다 현재 상황이 더 안좋다는 것을 의미한다.

현재 주식과 채권 가격이 급락하면서 금융사들은 자체적으로 자금 조달이 어려워진 상황이다. 여기에 글로벌 증시가 폭락하면서 주가연계증권(ELS)를 발행한 증권사들에 대해 해외 운용사들이 추가 증거금을 요구(마진콜)하면서 단기자금시장에 신용경색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증권사들이 자체 현금이나 자산을 매각해 증거금을 마련해야 하는 상황에서 가지고 있는 국채 등을 팔기 시작하면서 채권 가격은 지속적으로 하락했고 채권 금리는 급등세를 나타냈다.

이번 한은의 RP 무제한 매입과 대상 금융사 확대로 이전보다 많은 금융사들이 대량의 단기유동성을 확보할 수 있게 됐다.

하지만 실제 시장이 체감하기엔 어렵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미 증권사들은 마진콜 압박에 가지고 있는 국채들을 이미 상당량 내다 팔아치웠기 때문이다. 최근 국채 금리가 급등한 것도 이 때문이다.

RP 매입으로 기업 유동성 간접 지원

한은이 RP 매입을 통해 금융사에 자금을 공급하면, 금융사들은 자금을 활용해 정부의 채권안정펀드 등에 참여한다. 한은이 공급한 자금 중 얼마를 각각의 프로그램에 투입할지는 금융사가 결정하게 된다. 한은은 무제한 RP 매입을 통해 금융사가 요구하는 자금을 충분히 공급할 방침이다.

한은이 회사채·기업어음(CP)을 직접 살 수는 없지만 금융사에 유동성을 공급하면, 금융사들은 채권시장안정펀드에 출자하고, 여기서 회사채·CP를 매입하게 된다.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도 금융시장이 크게 흔들리자 기업어음매입기구(CPFF) 등을 설립해 1조달러 규모의 CP 매입 계획을 발표했다.

▲ 한은의 자금공급 흐름도. 출처=한은

한국판 양적완화?…틀렸다

시장은 이번 한은의 무제한 RP 매입에 대해 '한국판 양적완화(QE)'라고 해석했다.

윤면식 한은 부총재는 이날 금통위 직후 열린 설명회에서 "이번 조치를 양적완화라고 봐도 크게 틀린 건 아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이번 조치는 양적완화는 아니다. 

양적완화는 중앙은행이 금융시장의 신용경색 해소와 경기 부양을 위해 정부의 국채나 여타 금융 자산을 매입해 시장에 직접 유동성을 공급하는 정책을 말한다. 양적완화는 RP매입과 같이 일정기간 후에 유동성을 회수해 가는 것이 아닌 시장에 영구적으로 유동성을 공급하는 것이다.

무제한이라는 점에서 한국판 양적완화로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무제한이라고 하지만 실상은 RP 매입 수요가 있어야 유동성 공급이 이뤄지기 때문에 양적완화처럼 특정 액수를 목표로 제시할 수 없다.

윤 부총재는 "신청액을 전액 공급한다는 방침만 결정됐을 뿐 실제 입찰과정에서 요청액이 얼마 들어올지는 모른다"고 밝혔다.

실탄 소진하는 한은...남은 한발은? 

한은의 공개시장조작은 RP 매입 외에도 △채권안정펀드 유동성 지원 △통안증권 중도환매 △국고채 단순매입 등의 방법이 있다. 채안펀드는 오는 4월부터 증안펀드 등과 함께 시중에 유동성을 공급할 예정이다. 국고채 단순매입은 언제든 꺼낼 쓸 수 있는 카드다.

결과만 놓고 보면 지금까지 한은이 내놓은 정책들은 효과가 크지 않을 것이란 전망이다. 실제 유동성 위기를 겪고 있는 기업들에 대한 CP 매입, 부실기업들의 회사채 매입 등이 가장 효과적인 처방이기 때문이다.

제로 금리 인후 양적완화는 최후의 수단이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경기가 회복된 여러 이유 가운데 결정적인 것은 연준이 직접 회사채를 직접 매입해 기업들의 연쇄 부도를 막았다는 것이다.

이번 한은이 국공채 등 우량채권만 사들이는 것으로는 가장 얼어붙은 회사채 시장에 긍정적 신호를 줬다고 보기 어려운 대목이다.

이번 조치에도 유동성 우려가 지속된다면 한은 역시 일반 기업의 회사채와 CP를 직접 매입하는 방안을 논의할 것으로 보인다. 현재 한은법 제68조에서 한은은 국채와 정부가 보증한 유가증권, 금통위가 정한 유가증권만을 직접 매입 대상으로 하고 있다. 하지만 정부가 신용위험을 보증해준다면 한은도 연준처럼 회사채와 CP 매입이 가능해진다. 이 경우 국회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 무분별한 기업지원으로 중앙은행이 부실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로금리와 양적완화가 우리 경제의 체질을 악화시킬 우려도 존재한다. 금리가 낮다보니 이자부담이 낮아져 생산성이 떨어지는 좀비기업들은 계속 살아남는다. 생산성이 떨어지는 기업들이 많아지다보면 나라 전체가 저성장에 들어섰다. 저금리의 역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