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 봐! 나보고 ‘공백이’ 하지 말고 ‘빽빽이’로 개명하래...!”

나는 스마트폰을 쥔 손을 허공에 휘두르며 칭얼거렸다. 얼마 전 유튜브에 올린 영상에 달린 한 댓글 때문이었다. 채널 이름은 ‘공백의 책단장’인데 영상에서는 전혀 여백의 미가 느껴지지 않는다는, 그리하여 시청하기가 매우 피곤했다는, 날카로운 내용의 댓글이었다.

나는 계속해서 스마트폰을 노려보았다. ‘빽빽이로 개명하시는 게 어떨지..ㅋㅋ’ 문장 뒤에 따라붙은 두 개의 ‘ㅋ’이 못 견디게 얄미웠다. 기어코 친구를 울린 후 혀를 빼물고 달아나는 악동같이 야속했다. 익명의 댓글에 이렇게나 동요하다니 평소 같지 않았다. 이 유난스러운 마음은 뭘까? ‘뭐긴, 도둑이 제 발 저린 거지!’ 나는 중얼거렸다. 사실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권력이 공백을 허용하지 않듯, 나 자신도 공백을 쉽게 허용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을.

곤란하게도, 나는 가장 ‘공백’이 필요한 때에 ‘공백’을 허용하지 못한다. 바로 좋은 책을 읽을 때다. ‘빽빽이 사건’이 일어나기 나흘 전쯤의 일기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요조와 임경선이 나눈 교환일기를 담은 책, ‘여자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를 읽은 날이었다.

‘책을 읽을 때 여유를 좀 가지는 것이 좋겠다. 책을 통해 좋은 사유들을 전달받았다면 그것을 가만히 이어나가려는 노력의 시간도 필요하지 않을까?’

내게는 스스로를 살펴볼 시간이 필요했다. 내가 왜 그들의 글을 읽으며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는지, 왜 마음이 울렁였는지 들여다봐야 했다. 순간적으로 스쳐 지나가는 사연과 단상들을 집요하게 쫓아가 보려는 시도가 필요했다. 하지만 ‘공백’이 필요하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멈추지 못하고 책장을 넘겼다.

어째서일까? 그때 나는 두려웠던 것 같다. 그들 틈에서 나를 끌어올리는 것이 부끄러웠다. 유연하고 정갈한 그들의 생각에 비해 내 생각은 옹졸하고 거칠어 보였다. 그들의 일상은 다채롭고 농도 짙어 보였으나, 내 하루는 별 볼일 없이 허술했다. 그들의 언어는 아름답게 압축되어 있었으나, 내 문장은 산만하고 지리멸렬했다. 결국 나는 한 번도 멈춰 서지 못한 채 그대로 책의 마지막 장을 넘겼다.

영어사전에 ‘공백’이라는 단어를 치면 gap이라는 단어로 번역된다. 영단어 gap은 비슷해 보이지만 서로 다른 네 가지의 뜻을 가지고 있는데, 다음과 같다.

첫 번째, 공간적인 틈. 두 번째, 시간적인 차이. 세 번째, 사람이나 의견 사이의 격차. 네 번째, 무엇이 빠진 빈자리.

이 중 세 번째 의미에 유독 눈길이 머문다. ‘사람이나 의견 사이의 격차’. 넓고도 깊은 그들과 나의 격차. 이 막연함이 ‘gap’이고, 이 아득함이 ‘공백’이구나. 나는 늘 머리 위에 ‘공백’을 이고 지고 다니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문득, 나를 ‘빽빽이’라고 부른 사람에게 이런 댓글을 남기고 싶어진다. 저기… 이것 좀 보세요. 저는 공백이가 틀림없는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