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밤에 산책 겸 운동하러 나섰다가 갑자기 닥친 추위에 고생했습니다.

모자달린 두꺼운 겨울옷을 세탁소에 맡겨서,

어쩔 수 없이 허름하게 입고 나섰다가 그 성급함에 많이 떨게 된 거죠.

돌아보니 매년 봄이 오기 전에 이런 유사한 일이 반복되니 입맛이 씁니다.

일주일에 한번 씩 만나고 있는 탈북민 공동체서도

최근 이런 성급함 비슷한 걸로 마음고생을 하고 있습니다.

이번 코로나 사태로 정말 많은 사람들, 많은 영역들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아르바이트로 생활하는 젊은이들 사정이 많이 심각하다고 합니다.

그중에서 탈북한 젊은이들이 학비는 어찌 조달하는데, 아르바이트에 온전히 의존했던

생활비가 없어 생계를 걱정해야하는 수준까지 이르렀다는 얘기를 접했습니다.

그 모임에서 일정 책임을 지고 있는 십여 명이 요즘 같은 때이니 만나지는 못하고,

단톡방을 통해 그 젊은이들에 대한 대책을 논하게 되었습니다.

상황을 듣자마자 한 분이 여기 책임진 분들이 각각 지원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의견을 냈습니다. 그러자 다른 한 분이 그러잖아도 책임진 분들이

여러 부담을 안고 있는데, 언제가 끝일지 모르는 이 상황에서

그렇게 하면 부담들이 너무 커지니 전체 멤버들에게 알려 십시일반하자고 나섰습니다.

이에 가장 먼저 돕자는 제안을 했던 다른 분이 이일을 그렇게 키우면

북에서 내려온 나이든 분들이 왜 어려운 자기들은 빼고, 젊은이들만 돕냐고 형평성 문제를

제기할게 뻔해, 공개 시 아무 일도 할 수 없다며 답답해했습니다.

그러자 아무도 의견을 내지 않고 침묵했습니다.

심지어 의견 내지 않은 분들을 지명해 답을 달라고까지 했는데도 말이지요.

만나서 얼굴 대면하고 얘기했더라면 쉽게 풀릴 일이었겠지요.

기다리다 내가 한마디 의견을 달았습니다. 요지는 형평성 문제도 있지만, 시한이 있는

사안이니 이번에만 책임 있는 사람들끼리 나서 신속히 해결함이 어떻겠느냐는 거였지요.

내가 성급한 것이었겠지요? 아직 결론이 나지 않았습니다.

각자 입장과 처지가 다르니 무엇이라 권유하기가 조심스럽습니다.

또한 이러한 토론 진행 과정에서 언제 나설지도 여전한 숙제입니다.

그러나 나의 선의가 있는 만큼 당신의 선의도 있다고 생각하면 조금 맘이 가볍습니다.

합리성 너머 있는 긍휼의 마음을 믿고 싶었습니다.

이 코로나 사태가 얼마나 더 이어질지 가늠하기 어렵습니다.

바로 그 점 때문에 불안과 공포가 지금의 가장 무서운 적이라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비관, 부정보다 보다 낙관적이 되고, 긍정적이 되면 어떨까요?

퇴진을 앞둔 어느 기업인의 얘기가 이해가 되며 위로가 됩니다.

회사 운영기간 동안 가장 극적인 실패와 성공의 두 장면이 기억에 남는데,

극적 실패 시 하늘이 무너지는 심정이었는데, 당시 하루가 10년 같았다 합니다.

반면 극적인 성공 소식을 들었을 때 1초가 10년 같았었다고 고백합니다.

비율이 문제가 아니라 좋았던, 좋아질 쪽에 더 가치를 두면 넘어갈 수 있다는 말이 아닐까요? 이 시기 어렵더라도 봄의 저 너머를 바라보며 넘어 갔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