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유 4사 로고. 출처=각사

[이코노믹리뷰=이가영 기자] 코로나19 사태로 투자심리가 위축된 가운데 주요 산유국들의 추가 감산 합의까지 불발되면서 국내 정유업계의 재고평가 손실이 눈덩이처럼 커질 것이란 우려가 나온다. 지난 2년간의 부진을 딛고 올해 실적 반등을 기대하던 정유사들은 상반기 실적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에 놓였다. 

9일 정유업계에 따르면 8일(현지시간) 미국 뉴욕상업거래소(NYMEX)에서 서부텍사스산 원유(WTI) 가격은 한때 27.59달러를 기록해 전 거래일 대비 30%이상 폭락했다. 영국 런던 ICE선물거래소에서 1월 60달러선에서 거래되던 브렌트유 또한 30.33% 하락한 배럴당 31.54달러를 기록했다. 

석유수출국기구(OPEC) 회원국과 러시아 등 비(非)OPEC 산유국으로 구성된 OPEC플러스가 추가 감산 협상에 실패하고 이전 감산안에 대한 연장여부도 협의하지 못하면서 이날 국제유가는 곤두박질쳤다. 

상황이 악화되면서 국제유가가 곧 배럴당 20달러 밑으로 내려앉을 것이란 전망도 나왔다. 산유국들의 감산 합의가 무산되자 글로벌 투자은행 골드만삭스는 2분기와 3분기 브렌트유 가격 전망을 배럴당 30달러로 낮췄으며 최저 20달러까지 추락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특히 골드만삭스는 “코로나19로 석유 수요가 크게 줄 것으로 전망되는 가운데 벌어진 이번 상황은 2014년 가격 전쟁보다 훨씬 심각하다”고 우려를 표하기도 했다. 

국내 정유주(株)들도 우수수 52주 신저가를 갈아치웠다. 9일 SK이노베이션은 전 거래일 대비 8.24% 내린 9만9100원에, 에쓰오일은 9.80% 내린 5만8000원에 장을 마감했다. 

국제유가 하락은 정유업계의 재고평가손실로 이어진다. 정유사들은 보통 원유를 사고 2~3개월 치를 비축해놓는다. 그 결과 유가가 높을 때 샀던 원유비축분들은 재고평가손실로 작용한다. 

업계에 따르면 두바이유가 배럴당 5달러 하락할 때마다 SK이노베이션, GS칼텍스, 에쓰오일, 현대오일뱅크의 평균 재고손실이 각 1000억원, 700억원, 600억원, 250억원 가량 확대된다. 정유사마다 비축해 둔 원유 재고는 1000~2000만 배럴 정도로 추정된다. 

이에 따라 유가가 예상보다 크게 하락하면 재고평가손실도 더 커져 실적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게 된다. 

정유업계는 정제마진 하락과 코로나19 여파에 따른 수요감소에 이어 국제유가 폭락까지 겹치면서 바람앞의 등불처럼 위태로운 신세가 됐다. 

올 들어 회복 기미를 보이던 복합 정제마진은 코로나19 확산 후인 지난달 둘째 주부터 하락세를 띄고 있다. 2월 둘째 주 배럴당 4.0달러까지 올랐던 정제마진은 2월 셋째 주 3.0달러 2월 넷째 주 2.3달러에 이어 이달 첫째 주 1.4달러로 하락했다. 1주 새 0.9 달러나 하락한 수치다. 정제마진은 휘발유를 비롯한 석유제품 가격에서 원유 가격 등을 뺀 값을 말한다. 손익분기점인 배럴당 4달러를 넘지 못하면 손해가 발생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여기에 코로나19로 국내 정유업계의 중국 수요 회복도 장담할 수 없는 형국이다. 설상가상으로 한국내 코로나19 확산으로 중국은 물론 일본 등 전세계 하늘길이 막혀 항공유 소비도 크게 줄 것으로 전망된다. 대한석유협회에 따르면 지난해 전체 석유제품 수출 중 항공유가 차지하는 비율은 22%로 경우(37%)에 이어 두 번째로 많다. 

문제는 당분간 국제유가의 추락이 지속될 것으로 예측된다는 점이다. 컨설팅업체인 팩츠글로벌에너지(FGE)는 올해 석유 소비량이 하루 평균 22만배럴 감소할 것으로 전망했으며, 골드만삭스 또한 코로나19 확산 우려에 따른 소비 심리 위축, 물동량 감소 등으로 올해 전 세계 석유 수요가 11년 만에 처음으로 감소할 것이라는 관측을 내놓기도 했다. 1958년 이후 석유 수요가 줄어든 해는 미국이 경기 침체를 벗어나던 1993년과 글로벌 금융위기 때인 2008년, 2009년 등 세 차례에 불과하다.

상황이 이쯤 되면서 정유업계는 생산량을 줄이는 감산 카드를 꺼내고 있다. 실제 국내 1위 사업자인 SK에너지는 이달부터 울산 정제공장 가동률은 기존 100%에서 10~15% 낮췄다. 뿐만 아니라 에쓰오일, GS칼텍스, 현대오일뱅크 등 다른 정유사들도 감산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하지만 이 같은 노력이 실적회복에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미지수다. 코로나19로 감소한 석유 수요가 회복되지 않을 경우 정제마진 상승은 제한적일 것으로 점쳐져서다. 

정유업계 관계자는 “코로나19로 수요가 줄어든 상태에서 국제유가 급락이라는 불확실성까지 발생해 ‘엎친 데 덮친 격’”이라며 “사스나 메르스때보다 상황이 안 좋아질 것으로 본다”고 우려를 표했다. 

또 다른 정유업계 관계자도 “코로나19가 언제 진정될지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추가 감산합의까지 무산되면서 탈출구가 보이지 않는다”며 “1분기 어닝쇼크는 물론 올해 실적 전체가 우려되는 상황”이라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