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코로나 바이러스 확산세가 예사롭지 않습니다.

확진자가 나오면 급히 그쪽을 집중 방역하던 경로 추적 방역에서 이제 경로를 모르는

지역 사회 무차별 감염이 현실화되니 허둥지둥하는 모양새입니다. 어지럽고 혼란스럽습니다.

우리가 평소 활용하는 시각, 청각 등 오감 기능에서 눈이 사용하는 에너지가 40 프로에 이른다죠. 눈 감고 가만히 최근 펼쳐지고 있는 코로나 사태를 생각해 봅니다.

눈을 감아서 일까요? 선명하게 그림처럼 몇 장면이 떠오릅니다.

먼저 예전 초등학교 문방구 앞에 놓였던 두더지잡기 게임기가 생각납니다.

냅다 두더지를 향해 내리치면 바로 옆에서 다른 두더지가 튀어나오는 모습 말이죠.

이제까지 몇 번 확진자가 지나갔던 동선이 밝혀지면 다들 화들짝 놀라서 이리 저리 피하던

모습이 꼭 그 모습 같아 보였습니다.

이어서 공동체 생활하는 우리로서 다른 사람들과 무차별적으로 엮인 그림도 보입니다.

미국에서의 실험 모습입니다. 실험을 위해 80여명이 근무하는 회사의 출입문 손잡이에 형광물질을 붙인 감기와 비슷한 바이러스를 붙여놓았다지요. 이후 4시간 후에 형광검색기로 살펴보니 거의 모든 직원들의 컴퓨터 자판과 전화기, 화장실 손잡이 등에서 형광 바이러스가 발견됐다는 겁니다. 왜 아니겠습니까? 아마 그것은 시간이 지날수록 모든 사람들의 얼굴은 물론 호흡기에서도 검출되지 않았을까요?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이렇게 사정없이 주변과 얽혀져 있음을 알게 되니 공포스러워 지며 빌 게이츠의 경고가 제대로 들리기도 합니다.

‘신종 바이러스에 우리가 제대로 대비를 하지 않으면

가까운 미래에 판데믹(대유행)으로 수천만 명이 생명을 잃을 지도 모른다‘

지금 시간이 흘러가는 이 순간에도 바이러스 확산세는 이어지고 있는데,

아픈 사람, 방역하는 사람, 치료에 나서는 사람, 연구에 나서는 사람은 여전히 소수이고,

다수는 그저 황망히 지켜보는 처지라는 게 안타깝지만 현실입니다.

이 많은 다수는 어디에 있어야 할까요?

최근 어느 목사님의 칼럼을 읽었습니다.

노숙자 지원에 대한 번민에서 비롯된 묵상의 내용이었습니다.

현금성, 즉물적 지원만을 원하는 그들과 제대로 된 자립으로 이끌 근원적 방안에 대한 진지한 고민간의 간극이었습니다. 그러며 예화로 든 내용입니다.

‘어느 추운 날 영국 런던 인근 해안에서 갈매기들이 떼죽음을 당했다. 이유를 알아보았다. 추위에 얼어 죽은 것인가? 아니었다. 전염병도 아니었다. 이유는 추위로 관광객 발길이 끊어졌기 때문이었다. 죽은 갈매기들은 관광객이 주는 먹이에 의존했던 것이다.’

나는 목사님의 방안을 충분히 지지하면서, 하나 더하고 싶은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이 고민도 이번 한번으로 그치지 말고, 계속적으로 고민하고, 확장해서 다수가 함께 고민하는 과제로, 그렇게 해결책도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 다수도 지역 사회 무차별 감염 시기를 맞아 마스크 쓰고, 손 씻고, 개인위생 지키며 규칙에 협조해야겠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그치지 말고, 앞으로 이 문제에 대해 더 지속적인 관심을 가져야 이 바이러스와의 전쟁도 종식시킬 뿐만 아니라 보다 미래가 있는 사회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요? 위로가 필요한 시기, 그게 진정으로 손잡는 방법 같아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