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믹리뷰=최진홍 기자] 최근 국내 주요 기업의 트렌드 중 하나는 바로 준법경영감시위원회(준법위)의 설치다. 실제로 삼성전자는 준법위를 구성해 지난 13일 2차 회의까지 열었으며, KT도 구현모 사장의 등판과 함께 그동안 비상설로 운영하던 컴플라이언스(Compliance) 위원회를 상설화하고, 이를 이끌어갈 수장으로 최고준법감시책임자(CCO, Chief Compliance Officer)를 이사회 동의를 얻어 선임할 예정이다.

경영권 분쟁을 치르고 있는 한진그룹에도 준법위 논의가 나오고 있다. KCGI 및 반도건설과 연합해 조원태 회장과 날을 세우고 있는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은 13일 김신배 전 SK 부회장 등 지주회사 한진칼의 전문경영인을 추천하며 "이사회 정관에 거버넌스위원회, 준법감시 및 윤리경영위원회, 환경 및 사회공헌 위원회 등 위원회들을 추가로 신설하는 규정을 둘 것"이라고 말했다.

씁쓸한 공통점 두 가지
준법위를 도입하거나 준비하려고 시도하며, 혹은 제안하는 기업에는 씁쓸한 공통점이 있다. 바로 '지금까지는 준법위 수준의 경영 활동을 하지 못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는 점이다. 실제로 삼성의 이재용 부회장은 국정농단 사건에 휘말려 현재까지도 재판을 받고 있으며 KT는 황창규 회장을 둘러싼 불법 정치자금 논란이, 심지어 구현모 사장까지 연루됐다는 의혹도 이어지고 있다. 

한진그룹의 경우에는 갑질 논란을 통해 국민의 지탄을 받은 상황에서, 조현아 전 부사장이 준법위를 통해 조원태 회장의 불투명한 경영을 타파하겠다는 뉘앙스가 강하다.

이 외에도 씁쓸한 공통점은 또 있다. 바로 의지다.

현재 준법위를 논하는 기업들은 대부분 100% 자기의 의지대로 준법위를 도입하거나 준비하려고 시도하며, 혹은 제안하는 것으로 보기 어렵다. 실제로 삼성 준법위의 경우 서울고법 형사1부 정준영 부장판사가 지난해 말 재판에서 "정치권력으로부터 또 다시 뇌물 요구를 받더라도 응하지 않을 그룹 차원의 답을 가져오라"고 말하자 이에 부응해 구성된 성격이 강하다. KT도 불법 정치자금 혐의와 관련된 논란이 커지는 가운데 구현모 사장 체제의 불안감을 덜려는 수단에 불과하다는 말이 나온다. 한진그룹은 경영권 분쟁 과정이라는 점에서 조 전 부사장의 제안을 두고 순수성이 의심된다는 평가다.

이러한 현상은 곧 삼성과 KT는 물론 조 전 부사장 모두 자기의 불리한 상황을 타파하기 위한 임시변통으로 준법위를 활용하거나 혹은 홍보용, 선전도구로 내세웠다는 의심에 무게를 실는다.

특히 삼성의 준법위 논란에서 가중되는 분위기다. 이 부회장에 대한 5차 공판이 연기된 가운데 국회의원 43명과 민주노총, 한국노총,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참여연대, 한국YMCA전국연맹 등 시민단체는 지난달 21일 “삼성이 급조한 준법위가 삼성 지배구조에 개혁적 결과를 담보할지 여부는 앞으로 수년이 지나야 검증될 수 있는 것으로 단기간에 평가하기는 불가능하다”며 강하게 반발했다.

13일에는 483명으로 구성된 '이재용 파기환송심의 공정하고 정의로운 재판을 촉구하는 지식인 일동'이 기자회견을 열어 법원의 이재용 부회장 재판이 공정하게 이뤄져야 한다고 촉구하는 한편 준법위를 두고 "이 부회장에게 집행유예를 선물하기 위한 곡학아세"라고 비판했다. 재판부의 논리적 곡예가 가증스럽다는 격한 말까지 나왔다.

"해봐야 아는 것"
삼성 준법위의 진정성을 두고 다양한 비판이 나오는 것은, 우리 대한민국 경제사의 질곡을 고려하면 일정정도 받아들여질 소지가 있다. 멀리 갈 필요도 없이 삼성은 물론 LG, SK, 현대차 등 국내 주요 기업들이 줄줄이 엮였던 국정농단 사건만 봐도 알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준법위 이야기가 나오자 "쇼하고 있네"라는 냉소가 흐르는 셈이다.

그러나 삼성 준법위의 진정성에 비판하는 이들도 중요한 점을 간과하고 있다. 바로 기대효과다.

어차피 진정성이라는 것은 통계적으로 측량되고 정의되기 어렵다. 여러가지 상황이나 정황만으로 미루어보아 상대방의 진정성을 짐작하는 것은 가능하겠지만, 여러가지 상황과 정황만으로 상대방의 진정성을 확신하는 것은 위험하기 때문이다. 결국 결과에 대한 기대효과가 더 중요해진다. 상대방의 진정성을 확신하기는 어려워도, 그 동기에 따른 행위의 결론은 눈에 보이는 가시적 현상이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삼성 준법위의 가시적 현상은 어떨까. 아직 두 번의 회의만 했을 뿐이지만 그 행보의 연속을 보며 무조건 '면피성'이라고 비판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 중론이다. 당장 준법위의 위원장인 김지형 전 대법관은 진보성향의 법조인이며 2016년 구의역 사고와 2018년 김용균씨 사망사건의 진상을 파헤친 인물이다. 그는 이 부회장에게 독립적인 권한을 받았으며, 2차 회의를 통해 조만간 중점 검토 과제를 신중하게 결정할 것이라는 점도 밝혔다.

물론 노동조합 와해공작 등으로 논란을 일으킨 이상훈 삼성전자 이사회 의장이 구속된 상황에서 여전히 삼성 준법위에 대한 의심의 눈초리는 매섭다. 충분히 가능한 일이지만, 그 정도가 지나치다. 나아가 준법위가 어떤 긍정적인 파급효과를 가져올 수 있는지 모르는 상태에서 지금까지의 무난한 행보를 묻지마 행태로 비판하고, 이 과정에서 사법부까지 흔들어 '원하는 것을 이루겠다'는 자세로 나오는 것은 삼권분립 파괴라는 초헌법적 발상에 가깝다.

이제라도 준법위를 하겠다면, 법과 절차에 따라 준법위를 하겠다면 최소한의 시간은 보장하면서 그 기대효과를 기다려야 하는 것 아닌가. 면피성, 홍보성 꼼수라는 비판이 쏟아져도 뭔가 성과를 이뤄내면 그만이다.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것인가.

지난 5일 설립준비반이 발족한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를 두고 야당의 비판이 나올 때 청와대와 여당은 검찰개혁의 시작이자 공정한 사회의 정립이라는 기대효과를 강조한 바 있다. 공수처가 시대의 명령이라면 이행되어야 하며, 우리는 시간을 두고 믿음을 보여주면 된다. 비판이 쏟아져도 뭔가 성과를 이뤄내면 그만이다.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것인가. 그 믿음에 부응하지 못하면 또 다른 극복방안을 고민해야 한다.

결국 시간이 필요하고, 해봐야 하는 것이다. 스스로의 정의관념에 매몰되어 처음부터 삐딱하게만 바라보면 화끈한 일격에 성공했다는 나만의 뿌듯함은 남겠지만 우리의 손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모두, 잘 되는 길을 찾자
2017년 1월 미국 연방거래소(FTC)가 퀄컴을 상대로 시장 독과점을 이유호 전격 제소한 후, 미 캘리포니아주 산호세 연방지방법원은 지난해 5월 FTC의 주장을 받아들여 퀄컴의 특허료 사업 관행을 두고 반독점법 위반이라는 철퇴를 내렸다. 그러나 지난 8월 반전이 벌어졌다. 당시 미국 제9순회항소법원은 항소심이 끝날 때까지 특허 라이센스 관행 시정 명령 집행을 유예해달라는 퀄컴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이 과정에서 미 법무부의 행보가 눈길을 끈다. 미 법무부는 산호세 연방지방법원이 FTC의 손을 들어주자 이례적으로 퀄컴에 대한 반독점 판결집행을 연기해달라고 요청했으며, 퀄컴의 입장을 옹호하는 것이 아니라는 전제로 미국의 5G 경쟁력을 위해 신중한 조치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미 법무부의 어시스트가 미국 제9순회항소법원의 전향적 판단을 끌어낸 주역이라는 평가다. 5G 시대가 도래하며 각 국의 경쟁이 치열해지는 가운데 퀄컴이 흔들리면 미국의 통신 경쟁력이 휘청일 수 있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미 법무부는 전략적 선택을 한 셈이다.

삼성에도 비슷한 인식변화가 필요하다.

모든 현안에 면죄부를 주자는 뜻이 아니다. 국정농단 사건에까지 휘말렸음에도 만약 또 한 번 비슷한 행태를 저지르거나 논란을 반복시킨다면 엄정한 조치가 필요하다. 이 때의 조치는 단순한 수준의 처벌이 아니라 기업 해체 수준의 강력한 일벌백계로 이뤄져야 한다. 그러나 그 전까지는 '개선할 것'이라는 믿음에 부응할 시간을 줘야 한다. 

'잘못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고, 너의 진정성이 의심되니 그냥 앉아서 당해라'고 말하는 것은 다른 것을 떠나 지나치게 어리석다. 잘못했다는 혐의를 받는다면 공정한 재판을 거쳐 시시비비를 가리면 그만이고, 이 지점에서 꼼수를 부린다는 진정성에 대한 의심을 고집하는 것은, 비록 자초한 점은 있으나 우리나라 사법 시스템에 대한 지나친 모독이다.

지난 13일 문재인 대통령은 서울 대한상공회의소에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등을 만나 코로나 19에 따른 경기악화를 극복할 수 있는 방안을 공유했다. 이 자리에서 문 대통령은 각 그룹의 경영자들에게 든든한 믿음을 보이는 한편 지금의 경제회복의 흐름을 되살려야 한다고 말했다.

최근 일각에서 국내 경제위기를 지나치게 증폭시키고 있지만, 우리 경제는 생각보다 튼튼하다. 무엇보다 현 문재인 정부는 일부 스텝이 꼬이기는 해도 나름 견고한 정책을 바탕으로 의미있는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그 연장선에서 경제인들과의 만남을 통해 새로운 대한민국의 도약을 준비하는 분위기다. 이러한 분위기를 살리기 위해서라도, 우리에게는 시간을 주려는 인식변화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