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이 글은, 어떤 방법이 더 우월하다거나 옳다는 주장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싶다. 다만 정직함, 안전함, 통찰력, 다수의 행복과 같은 것들이 가치 있다는 데에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여러 군데 ‘닥터 쇼핑’을 하던 한 돌출입 환자로부터 기이한 이야기를 들었다.

돌출입수술을 하면 입을 넣는 양을 조절할 수 없어서 거의 대부분 합죽이가 되기 때문에 양악수술을 해야 옳다라는 이야기를 듣고 온 것이다. 돌출입수술은 치아 발치한 만큼을 다 넣어야 하기 때문이라는 부연설명도 전해주었다. 헛웃음이 났다.

파스타는 밀가루 반죽을 소금물에 넣고 삶아 만드는 이탈리아의 요리를 총칭하는 음식이다. 그중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스파게티를, 이태리에서 젓가락으로 먹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어느 날 한 이탈리아인이 한국에 왔다고 가정하자. 한국인들이 짜장면을 젓가락으로 먹는 것을 본 그는, 스파게티를 젓가락으로 먹는 것을 시도해 본다. 결과는 어떨까? 면을 제대로 먹기도 어렵고, 식탁은 이내 엉망이 될 것이다. 익숙하지 않은 젓가락질로는 면을 잘 집을 수도 없고, 집는 양을 조절하기도 어렵다. 애써 집은 면도 미끄러져 떨어지기 일쑤다. 너무 세게 힘주어 집으면 면이 끊어져 버릴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그 이탈리아인이 ‘내 젓가락질이 서툴러서 그렇다’고 고백한다면, 참 정직한 것이다.

그런데, 만약 ‘젓가락질은 나쁜 식사 방법이다. 식탁이 엉망이 되고 제대로 면을 먹기 어렵다’고 한다면 어떨까? 자신의 젓가락질이 서툰 것을 마치 젓가락질 자체가 태생적으로 문제 있는 방법인 양 덮어씌우는 것이다.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동양권의 젓가락질을 비하하는 것처럼 들릴지도 모른다. 알고 보니 직업이 포크 판매상이었으면 더 비열하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누군가가 “돌출입수술을 하면 입을 넣는 양을 조절할 수 없어서 거의 대부분 합죽이가 된다” 고 했다면, 이 문장에는 중요한 단어가 빠졌다. ‘나’라는 주어다. 즉, “ ‘내가’ 돌출입수술을 하면, ‘나는’ 입을 넣는 양을 조절할 수 없어서, ‘나는’ 거의 대부분 환자를 합죽이로 만든다”는 자백에 다름 아니다. 자신이 젓가락질을 잘 못 하는 것을 젓가락질 자체가 문제가 있는 기술인 것처럼 호도해서는 안 된다. 정직하지 못한 일이다.

돌출입수술은 치아를 뺀 만큼 입을 다 넣는 수술이 아니다. 만약 그만큼을 무조건 다 넣으면 거의 합죽이가 된다. 치아를 빼서 생긴 공간 중 얼마만큼만 후방이동 시키는가에 따라서 수술의 성패가 결정되는 수술이다. 심한 돌출입은 많이 넣고, 덜 심한 돌출입은 덜 넣는다. 상식적이지만 그게 핵심이다.

학술 토론장에서 어느 연자가 자신이 돌출입 환자에게 돌출입수술(전방분절절골술, ASO)을 집도한 후 합죽이가 되어버린 증례를 보여주면서, “이래서 돌출입수술은 문제다, 그래서 난 양악수술을 한다” 고 발표하는 경우에, 그 연자에게 무슨 말부터 해주어야 할지 모르겠다. 차마 면전에서, 돌출입수술이 문제가 아니라, 당신 손이 문제라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사실, 스파게티를 젓가락으로 먹든, 짜장면을 포크로 먹든, 맛있고 깔끔하게 먹고 만족스러우면 그만이다. 좀 흘리거나 묻혀도 치우고 닦으면 된다. 그러나 양악수술과 돌출입수술은 그렇게 호환되기 어려운 부분이 있고, 행여 잘못된다면 그냥 치우고 닦아서 될 일이 아니다. 한 사람의 소중한 일생, 심지어는 생명이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물론 수술대상이나 수술법의 적용 등에 관한 판단은 집도의에 따라 다르고, 의사의 개인적인 의학적 소신과 선호도가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돌출입수술을 20년간 해온 필자의 개인적인 판단은 다음과 같다.

대부분 정상교합을 가진 돌출입에서는, 무턱이나 가성 무턱(무턱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기준선에 맞는 가짜 무턱)이 동반된 경우가 훨씬 더 많다. 이 경우 필자는 물론 돌출입수술(과 턱끝수술)을 한다. 그런데 만약 이 경우에 상하악 모두를 후방이동시키는 양악수술을 한다면 주로 회전이동을 하는 수술 특성상 인중 부위(A포인트)가 덜 들어가는 문제와 아무 죄 없는 무턱이 뒤로 들어가 더 심한 무턱이 되는 문제가 생긴다고 (필자는) 판단하고 있다. 그래서 턱끝을 다시 앞으로 양껏 전진시켜 놓은 경우를 자주 본다. 딱한 일이다.

‘그리워하는데도 한번 만나고는 못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고 썼던 피천득도 아사코와 다른 길을 갔다. 동업하다가 각자 독립하기도 하고, 결혼해 살다가 헤어지기도 한다. 서로 갈 길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게 더 발전적일 수 있다. 입은 뒤로 가고 턱끝은 앞으로 가야 하는, 즉 입과 턱끝의 갈 길이 서로 다르고 각각 달라야만 하는 돌출입(과 무턱)에서, 왜 굳이 양악수술을 하는 것인지 필자는 잘 이해할 수가 없다.

큰맘 먹고 양악수술을 받았는데 여전히 돌출입이 남아 얼마 전 필자를 찾은 환자는, 간호사인 여동생의 도움으로 다시 돌출입 재수술을 할 수 있게 되었다며 글썽였다. 안타까웠다. 기존 양악수술 때 박혀있던 핀과 나사를 모아, 원하는 대로 환자에게 주었다. 환자가 가져간 그 핀과 나사는 그녀에게 어떤 의미였을까?

한편, 돌출입 중에는 사실 집도의의 선호도에 따라서, 양악수술을 해도 되고 돌출입수술을 해도 되는 경우가 있다. 돌출입과 동시에 약간의 (무턱의 반대인) 주걱턱이 동반된 양악전돌증 케이스다. 이 경우에도 필자는 돌출입수술(과 턱끝후퇴수술)을 선택할 것이다. 1시간 이내에 끝나는 돌출입수술이 상대적으로 더 안전하고 손쉽기 때문이고, 무엇보다 환자가 더 편하다. 사실, 양악수술 후 되돌릴 수 없게 된 사례들이 매스컴을 통해 이미 알려진 것은 숨길 수 없는 팩트다. 양악수술에 대한 두려움으로 ‘피난’오는 환자들도 있다. 반면에 돌출입수술의 경우, 적어도 이제까지 알려진 바, 이 수술로 인한 치명률이 없는 것 역시 팩트다. 수술부위가 상대적으로 얕아 출혈이 적고 상하악을 묶지 않는 것이 주요인일 것이다. 물론 양악수술이 나쁜 수술인 것은 전혀 아니다. 멋진 수술이다. 포크질(?)이 나쁜 기술이 아닌 것과 같다. 심한 주걱턱, 심한 비대칭, 심한 소하악증 등에서는 양악수술이 답이다.

그러나, 내 환자만큼은 모두 항상 안전할 것이라고 담보할 수 있는 외과의사는 없다. 수술부위가 깊고, 술후 상하악을 결찰하는 경우 더 그렇다. 신경손상도 그렇지만, 급성 출혈이나 호흡곤란과 같은 치명적 위기의 순간은 예기치 못하게, 불가항력으로 어느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다. 양악수술 후 상하악을 묶지 않는 술식의 출현은, 역설적으로 질식 위험성에 대한 자구책임을 시사한다. 양악수술하던 환자를 구급차로 대학병원에 이송해 응급 혈관색전술로 지혈해 살렸다는 아찔한 무용담도 직접 들었다. 잠재적 위험성을 극복하고 가치있는 수술법을 통해 주걱턱으로 마음고생 하는 환자들에게 새로운 삶을 선사하는 양악수술 집도의는 박수받을 만하다. 필자도 꼭 필요한 경우 양악수술을 집도한다. 모두의 안전하고 좋은 결과를 기원한다. 그러나, 돌출입 환자, 적어도 동시에 무턱을 가진 환자는 양악수술을 피했으면 하는 개인적인 바람이 있다.

애써 양악수술을 받고 나서, 다시 필자를 찾아와 돌출입수술을 받는 환자의 케이스가 더 이상 생기지 않기를 소망한다. 환자에게 돌출입, 양악, 윤곽수술은 일생에 단 한 번의 수술로 끝나야 한다.

그것이 의사에게도 환자에게도 행복한 일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