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북한산진흥왕순수비. 서울시 북한산의 비봉(碑峰)에 있었다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국보3호. 19세기 추사 김정희에 의해 발견되었고 화강암제로 비신의 높이155.1㎝, 너비71.5㎝, 두께16.6㎝이다. 비문은 11행인데 상단부의 글자가 있는 쪽이 파실 되어 각행의 정확한 자수는 알 수 없다. 서체는 해서체이다.<전시전경 사진:권동철>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1786~1856)는 충남예산 향저(鄕邸)에서 태어났다. ‘북학의’를 저술한 실학자 박제가(朴齊家)가 스승이다. 추사는 경학, 금석고증, 시문, 회화, 전각 등 다양한 분야에 정통했다.

굴곡진 파란만장한 생애를 살았지만 추사에게서 가장 큰 전환점 중 하나가 1809년 24세에 아버지를 따라 북경을 방문했을 때이다. 거기서 청조고증학을 집대성한 78세의 석학 옹방강(翁方綱), 47세 완원(阮元)과의 역사적 만남이 이뤄진다.

“추사는 중국인 제자들도 출입이 제한돼있던 옹방강의 서재인 석묵서루(石墨書樓)를 자유롭게 출입하면서 노대가의 사랑 속에 정성어린 가르침을 받는다.(중략)그래서 자신의 비장진적들을 하나하나 지적해 가르치는데 ‘당각본 공자묘당비(唐刻本孔子廟堂碑)’, ‘육방옹서(陸放翁書) 시경(詩境) 각석탁본(刻石拓本)’…등이 그것이었다.

이와 같이 옹방강은 금석학의 골수를 전수하는 외에 자신의 경학(經學)까지도 추사에게 가르친다.”<가헌(嘉軒) 최완수(崔完秀)-간송미술관, 한국민족미술연구소 소장, 전시도록 中>

이때 40일간 북경방문에서 추사가 받았던 학습과 경험의 자극은 훗날 추사의 전 생애를 관통하는 예술세계의 중심이 되었음은 충분히 짐작이 되는 대목이다. 우웨이산(吴为山) 중국미술관 관장 역시 지난해 6월18~8월23일까지 중국 국가미술관에서 개최되어 총30만 명의 관람객이 방문하여 뜨거운 관심을 나타낸 바 있는 동명(同名)의 전시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다.

“선생은 청나라에 와서 옹방강과 완원을 만나서, 서예의 모국에서 대량의 희귀한 탁본을 보게 되어 안목이 크게 넓어졌으며 서학(書學)사상과 서예창작에 큰 영향을 받았습니다.”

▲ 도덕신선(道德神僊), 19세기 종이에 먹 32.2×117.4㎝ 개인소장. 끝에 적힌 관지를 통하여 침계(梣溪) 윤정현(尹定鉉,1793~1874)이 판서에 오르자 이를 축하하는 뜻으로 써준 작품임을 알 수 있다. 김정희가 함경도 북청에 유배되었을 때, 함경도감사가 되어 추사를 돌보아 주었다.<사진:예술의 전당>

추사는 청조의 서풍변화에 영향을 끼친 문자학상의 주요 분야인 금석고증학 방법론을 기반으로 현장을 답사, 업적을 남긴다.

“북청 유배 시 청해토성 출토 석창과 석부를 고고학적으로 규명했고, 평양지방 출토 ‘천추만세(千秋萬世)’ 명문벽돌 글자체가 한대의 것임을 입증해내기도 하였다. 한국서예 역사연구와 고고학적 맥락에서 보면 추사 또한 외부 수입학문인 청대(淸代)의 금석고증학을 단순모방을 넘어 완전히 조선화 자기화 해내고 있는 것이다.”<이동국,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수석큐레이터>

한편 이번 '추사 김정희와 청조문인의 대화'전시는 대련, 두루마리, 서첩, 병풍 등 추사의 일생에 걸친 대표작품과 추사를 재해석한 현대작품 등 총120여 점으로 1월18~3월15일까지 예술의전당(사장 유인택) 서예박물관에서 성황리에 전시 중이다. 특히 추사 학예의 특질인 ‘괴(怪)의 미학(美學)과 동아시아 서(書)의 현대성(現代性)’을 주제로 △유희삼매(遊戲三昧) △해동통유(海東通儒) △학예일치(學藝一致) 등 크게 세 가지 섹션으로 구성하였다.

간송미술문화재단, 과천시 추사박물관, 제주 추사관, 영남대박물관, 김종영미술관, 수원광교박물관, 이천시립월전미술관, 선문대박물관, 일암관, 청관재, 일중문화재단, 개인 등 30여 곳이 전시에 참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