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잎에 송알송알 맺혀 꽃말에 귀 기울이는 물방울.

풀잎 위 고요히 안착하여 스스로를 빛내는 영롱한 물방울.

스며들거나 깐깐오월 돋을볕이면 증발할 것만 같은,

번지거나 명지바람이면 합쳐져 흘러내릴 것만 같은 한순간, 순간!

이윽고는 얽박고석 위 얼룩으로 남는 물, 방, 울.

-이흔복 <물방울의 시>

자연의 의미를 짚어보자. 알다시피 자연은 도교의 근본사상이다. 도교에는 우주에 네 가지 큰 것이 있다고 가르친다. 사람과 땅, 하늘과, 자연이다.

사람의 근원은 땅이고, 땅의 근원은 하늘이며, 하늘의 근원은 자연이 된다. 이때 도는 천하 만물의 어머니이기에 자연과 근원이 같다. 그래서 도는 천하 만물의 어머니 품속이자 가장 큰 근원인 자연으로 돌아가고자 함에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연에 흡수되는 방법은 뭘까. 근원의 본질을 따르는 것이다. 자연이라는 근원에 흡수되기 위해서는 자연의 본질을 따라야 한다.

이번에는 자연의 본질이 궁금해진다. 자연의 본질은 무위(無爲)다. 무위란 말 그대로 ‘이룸이 없는 상태’다. 위(爲)는 ‘이루다, 만들다, 다스리다’ 등을 뜻하는 의도적 행위를 지칭한다. 즉 삼라만상의 운행에 인간의 욕망을 의도적으로 무리하게 개입하지 않는 것이 무위다.

이 같은 무위가 우선돼야 근원인 자연에 흡수가 가능하다. 문제는 무위가 그리 쉽지 않다는 데 있다. 의도적 행위를 하지 않기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무위가 아니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라. 지금 당신의 삶의 방식은 무위인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무위로 만들기 위해 지금 당신을 지배하고 있는 생각의 틀, 기존 가치의 틀, 기존 사고의 틀, 기존 언어의 틀을 깨야 한다. 무위는 그러니 지금의 삶의 방법을 끊임없이 변화시켜야 가능하다.

한 예를 들어보자. 우리는 사각형의 의식 속에 갇혀 있다. 사각형의 집에서 사각형의 차를 타고 사각형의 사무실 건물로 들어가 사각형의 책상에서 사각형의 노트북이나 PC를 켜고 알게 모르게 사각형적 생각을 한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자신이 사각형에 갇혀 살고 있는지조차 모른다. 이것이 당신을 지배하고 있는 생각의 틀이고, 기존 가치의 틀이며, 기존 사고의 틀이다. 그리고 이것이 기존 언어의 틀이다. 이 틀을 깨야 진정으로 무위에 다가가는 것이다.

그래서 무위는 결국 새로운 틀을 만들어가는 무불위(無不爲)라고 할 수 있다. ‘무위자연’의 의미가 ‘무불위자연’로 돼야 진정으로 자연이라는 근원에 흡수돼 ‘스스로 그러하게’ 되는 것이다.

오늘 소개할 이흔복 시인의 <물방울의 시>는 무위자연의 의미를 되짚게 한다. 시인이 관찰하는 물방울은 자연으로 돌아가기 위해 무위를 행한다. 즉 그냥 꽃잎에 방울로 맺혀만 있는 게 아니라 그 꽃잎의 꽃말에 귀기울인다.

기존의 자기 중심의 틀을 벗어나 타자의 사고 틀을 받아들이는 무불위를 행하는 것이다. 덕분에 물방울은 스스로 영롱해 질 수 있다. 비록 순간적으로 오월 볕에 스며들거나 증발할 것 같은, 명지바람이 불면 번지거나 흘러내릴 것 같은 초조함과 고난이 있지만 얽박고석 위 ‘얼룩’으로 자연의 흐름을 타게 되는 것이다.

기업의 성공전략도 이와 같아야 한다. 리더는 직원들에게 자연에 흡수되는 방법을 빨리 깨닫게 해야 한다. 끊임없이 직원들의 기존 사고의 틀, 기존 가치의 틀을 깨도록 교육하고 독려해야 한다. 무위자연에서 배우는 무위경영이다.

황인원 시인·문학경영연구원 대표자연의 의미를 짚어보자. 알다시피 자연은 도교의 근본사상이다. 도교에는 우주에 네 가지 큰 것이 있다고 가르친다.

사람과 땅, 하늘과, 자연이다. 사람의 근원은 땅이고, 땅의 근원은 하늘이며, 하늘의 근원은 자연이 된다. 이때 도는 천하 만물의 어머니이기에 자연과 근원이 같다.

그래서 도는 천하 만물의 어머니 품속이자 가장 큰 근원인 자연으로 돌아가고자 함에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연에 흡수되는 방법은 뭘까. 근원의 본질을 따르는 것이다. 자연이라는 근원에 흡수되기 위해서는 자연의 본질을 따라야 한다.

이번에는 자연의 본질이 궁금해진다. 자연의 본질은 무위(無爲)다. 무위란 말 그대로 ‘이룸이 없는 상태’다. 위(爲)는 ‘이루다, 만들다, 다스리다’ 등을 뜻하는 의도적 행위를 지칭한다.

즉 삼라만상의 운행에 인간의 욕망을 의도적으로 무리하게 개입하지 않는 것이 무위다.

이 같은 무위가 우선돼야 근원인 자연에 흡수가 가능하다. 문제는 무위가 그리 쉽지 않다는 데 있다. 의도적 행위를 하지 않기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무위가 아니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라. 지금 당신의 삶의 방식은 무위인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무위로 만들기 위해 지금 당신을 지배하고 있는 생각의 틀, 기존 가치의 틀, 기존 사고의 틀, 기존 언어의 틀을 깨야 한다. 무위는 그러니 지금의 삶의 방법을 끊임없이 변화시켜야 가능하다.

한 예를 들어보자. 우리는 사각형의 의식 속에 갇혀 있다. 사각형의 집에서 사각형의 차를 타고 사각형의 사무실 건물로 들어가 사각형의 책상에서 사각형의 노트북이나 PC를 켜고 알게 모르게 사각형적 생각을 한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자신이 사각형에 갇혀 살고 있는지조차 모른다. 이것이 당신을 지배하고 있는 생각의 틀이고, 기존 가치의 틀이며, 기존 사고의 틀이다. 그리고 이것이 기존 언어의 틀이다. 이 틀을 깨야 진정으로 무위에 다가가는 것이다. 그래서 무위는 결국 새로운 틀을 만들어가는 무불위(無不爲)라고 할 수 있다. ‘무위자연’의 의미가 ‘무불위자연’로 돼야 진정으로 자연이라는 근원에 흡수돼 ‘스스로 그러하게’ 되는 것이다.
오늘 소개할 이흔복 시인의 <물방울의 시>는 무위자연의 의미를 되짚게 한다. 시인이 관찰하는 물방울은 자연으로 돌아가기 위해 무위를 행한다.

즉 그냥 꽃잎에 방울로 맺혀만 있는 게 아니라 그 꽃잎의 꽃말에 귀기울인다. 기존의 자기 중심의 틀을 벗어나 타자의 사고 틀을 받아들이는 무불위를 행하는 것이다.

덕분에 물방울은 스스로 영롱해 질 수 있다. 비록 순간적으로 오월 볕에 스며들거나 증발할 것 같은, 명지바람이 불면 번지거나 흘러내릴 것 같은 초조함과 고난이 있지만 얽박고석 위 ‘얼룩’으로 자연의 흐름을 타게 되는 것이다.

기업의 성공전략도 이와 같아야 한다. 리더는 직원들에게 자연에 흡수되는 방법을 빨리 깨닫게 해야 한다. 끊임없이 직원들의 기존 사고의 틀, 기존 가치의 틀을 깨도록 교육하고 독려해야 한다. 무위자연에서 배우는 무위경영이다.

황인원 시인·문학경영연구원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