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9년 곽석손, 맨 오른쪽이 오당 안동숙 화백

-진주로 내려가신 게 정확히 언제인가요?

1983년입니다. 동양화가이신 안동숙 선생님과 서양화가 정문현 교수님의 추천으로 가게 되었어요. 사실 그 전에는 그분과 일면식이 없었어요. 그 전 해에도 제의를 받은 적이 있었는데, 아이들이 아직 어린 데다, 너무 낯설고 기댈 언덕이 없는 곳이어서 거절의사를 밝혔었죠. 그런데 다시 제의를 받고는, 그래도 나를 인정해 주고 필요로 하는 곳에 가는 게 맞지 않나 싶어서 결정을 내린 거지요.

한편으로는 서울 아닌 다른 곳에 대한 기대도 있었습니다. 서울에서 나고 자랐기 때문에, 게다가 그때는 막 개발 중인 잠실에 살 때라서, 좀 더 자연의 체취가 물씬 풍기는 곳에 대한동경이 있었거든요. 물론 시어머니나 남편의 배려도 결정하는데 커다란 힘이 되었지요.

다른 한편으로는 권영우 선생님의 영향이 있었어요. 선생님께서는 예술가에게 익숙한 자리에 머무는 일은 정체이자 죽음이라며 모든 것을 버리고 파리로 떠나셨어요. 놀랍기도 하고 무엇보다 부러웠습니다. 아이들 때문에 따라나설 수 없는 처지여서 더욱 그랬어요.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그때 선생님과 사모님의 배려로 작업실을 물려받게 되었는데, 선생님의 작품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작업실에서 새로운 것을 찾아 떠나는 예술정신을 되새기곤 했어요.

권영우 선생님께서 파리로 가신 것에 비하면 아주 작은 떠남에 불과하지만, 경상대학교가 있는 진주로 내려간 데에는 새로움에 나를 맡겨보 고자 하는 도전의 의지가 들어 있습니다.

-권영우 선생님께서 파리로 가신 게 언제죠?

1970년대 중반입니다 제가 선생님 작업실을 쓴 것은 1981년부터 1985년 사이에요. 사모님께서 선생님의 작업실을 잘 관리해달라는 말씀을 해오셔서 기쁘고 영광스러운 마음으로 사용하게 된 거죠. 그래서 진주로 내려가면서 학교와 선생님의 작업실을 오가며 작업을 했습니다.

▲ 1999년 조일일보미술관 개인전. 함섭 화백

-처음으로 하는 낯선 곳에서의 생활이 어떤 식으로든 작업에 영향을 끼쳤겠지요?

물론 엄마이자 아내이며 며느리로서 지방을 오고가는 생활이 힘들기는 했어요. 그래서 더 열심히 작업을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이들을 두고 왔는데, 내가 편하게 지낼 수는 없지 하는 마음이 늘 저를 붙들고 있었거든요.

하지만 한편으로는 마흔에 바라보는 자연이 나에게 어떻게 다가올 것인지 기대가 되기도 했습니다. 예를 들면, 경상대학교에 내려갔더니 학생들 작업실의 먹물 양동이에 매화가 꽂혀있는 거예요. 요즘에야 꽃이 많아졌지만 그때만 해도 서울에서는 매화가 귀한 꽃이었습니다. 그러니 풀과 꽃이 지천인 모습을 보며 어떻게 안 놀라겠어요.

남쪽의 야성적이며 풍요로운 자연 앞에서 새로운 체험을 한 것이죠. 틈만 나면 새로운 풀과 나무와 꽃을 관찰하고 교감하려 했지요. 진주에서의 삶은 도시에서 자란 저에게 자연과의 교감을 통한 균형감각 같은 것을 선물로 주었어요. 아주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말하자면 관찰대상으로서의 자연이 아니라 그 속에 들어가 사는 것으로서, 삶 그 자체로서의 자연을 경험하신 것이네요.

물론 직접 땅을 일구며 사는 분들에 비하면 저는 여전히 아웃사이더겠지요. 하지만 제가 살아온 생에 비추면, 그 자연은 훨씬 더 생활밀착적인 자연입니다. 지급도 제가(한국화가 송수련,한지화가 송수련,송수련 화백,宋秀璉,SONG SOO RYUN,송수련 작가,Hanji Painter SONG SOO RYUN,한지작가 송수련,종이회화 송수련,여류중견화가 송수련, KOREA PAPER ARTIST SONG SOO RYUN, KOREAN PAPER ARTIST SONG SOO RYUN) 사십 대를 그토록 자연이 충만한 곳에서 맞을 수 있었던 것에 감사해요.

△글=박철화, 중앙대학교 예술대 문예창작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