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1년 동산방 갤러리 개인전. 이철주 교수, 오태학 교수, 장리석 화백, 심경자 교수

-추상 작업을 하는 여성 한국화가로는 거의 최초의 전시회 아니었나요?

글쎄요, 잘 모르겠어요. 조용히 작업을 하는 분들은 이미 계셨어요. 단지 전 젊었고, 그만큼 무모해서 전시회를 열 수 있었던 거죠. 여성에다, 결혼을 해서 아이를 셋이나 둔 주부이니 남보다 뭔가 더 열심히 하지 않으면 작가로서 인정받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공모전에도 꾸준히 출품을 했고, 개인전도 연 것이죠. 실제로 1977년 국전에서는 낙선을 했어요. 속이 많이 상했어요. 이미 국전에서 특선을 했고, 개인전까지 연 기성작가가 계속 공모전에 매달리는 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신 분들도 있었죠. 하지만 전 자신을 확인해 보고 싶었어요. 아내이자 며느리이자 애들 엄마라는 일상적 존재의 한계를 넘으려면 그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었거든요.

그래서 선생님의 뜻을 거스르는 걸 알면서도 공모전에 계속 출품을 했어요. 결혼을 하고 처음으로 무리해서 작업실을 얻은 것도 이때입니다. 당시 부천에서 살았는데, 전철을 타고 이화여자대학교 앞 작업실로 직장인처럼 출근을 했어요. 아이들을 셋이나 두고 집을 나섰으니 더 열심히 하지 않으면 난 못된 사람이다'라고 스스로를 채찍질하며 서울과 부천을 오갔어요.

▲ 145x208cm

-거리도 그렇고, 당시의 교통상황을 감안하면 쉬운 선택은 아니었을 텐데요?

달리 선택이 없었어요. 화실의 문을 열고 들어가면 오늘도 여기에 내가 있구나 하는 안도감과 함께 이유 모를 슬픔이 찾아들곤 했어요. 그림을 앞에 두고 운적도 있어요. 너무나 막막하고, 가정주부로서의 책임감과 나에 대한 기대 사이에서 동요하던 시기입니다. 현실적인 중압감에 많이 괴로워했어요.

-국전에서 문공부장관상을 수상하신 게 그 무렵이죠?

1978년이에요. 역시 제목은 ‘관조’였구요.

-어린 아이들을 집에 맡겨두고 무리해서 작업실을 얻을 정도의 굳은 결심이 결실을 본 셈이군요?

작업실이 필요한 이유는 ‘일상 속의 존재'에서 벗어나 작업에만 몰두할 수 있다는 거예요. 오로지 ‘작업을 하는 사람’, 말 그대로 작가가 될 수 있는 거죠.

△글=박철화, 중앙대학교 예술대 문예창작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