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0년 백두산 여행

-대학을 졸업하고 잠시 휴지기가 있었죠?

겉으로는 그럴 수 있어요. 하지만 쉬지는 않았어요. 당시만 해도 여자와 가정생활을 떼어서 생각하기 어려웠거든요. 그래서 저는 결혼을 아주 늦게 하든가, 아니면 빨리 해서 생활의 안정을 먼저 찾은 뒤에 그림을 하자고 생각했어요. 마침 작가의 길을 이해해줄 사람을 만나 대학 졸업식도 갖기 전에 결혼을 했죠. 다행인지 아이들을 낳고 키우면서도 가정생활 때문에 작업에 많은 지장을 받지는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어려움이 아주 없지는 않았지만, 시어머니가 살림과 육아를 도와주신 덕분에 따듯한 배려 속에서 작업을 계속할 수 있었어요. 어느 때는 작업을 하라며 아이들을 업고 나가시기도 하고, 또 어느 날은 초여름인데 망초를 한아름 들고 오셨어요. 제가 꽃을 좋아한다는 것을 아시고는 야산에서 꺾어 오신 거죠.

시들기 전에 전해주시려고 황망히 서둘러 오신 티가 역력했어요. 그래서 지금도 망초 꽃을 보면 돌아가신 시어머님의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져서 그분 생각에 가슴이 아립니다. 마음껏 바라볼 수 없을 정도로 결혼 초에 작업을 제대로 못한 것은 사실이지만, 속으로는 그림을 갈구하며 계속 그려온 것이라 할 수 있어요.

물론 그림 작업에 전적으로 몰두하지는 못했어요. 그런 상황이 너무 힘들어서 눈물을 흘리기도 했구요. 하지만 그게 다 내 작품세계에 녹아들어갈 삶의 자양분이 아니었을까 싶어요. 그런데 어느 날 내가 왜 이렇게 힘들까 생각해 보았더니, 시댁에는 마당구석에 조그만 사철나무 한 그루만 외롭게 서 있을 뿐, 식물이라곤 전혀 없는 거예요. 나는 자연이 없는 곳에서는 살기 어려운 사람이구나 하는 것을 그때 뼈저리게 깨달았어요.

지금도 이사를 가거나 하면, 맨 먼저 풀과 나무를 찾고, 집에다 꽃을 기르려 애쓰죠. 그림과 자연은 제게 하나나 마찬가지에요.

▲ 207x290cm

-그러면 대학원에 진학한 시기는 언제인가요?

결혼 2년 뒤인 1971년이에요. 제가 공부를 계속하고 싶어 한다는 걸 남편에게서 전해들은 시어머니께서 흔쾌히 허락하셔서 진학했어요. 1973년에 성신여자대학교 대학원으로 갔는데, 은사이신 안상철 선생님께서 학교를 옮겨 그 대학에 계셨거든요.

-국전 수상도 그때부터죠?

1973년 22회 국전에서 처음 특선을 받았어요. 형태가 좀 남아 있는 반추상계열의 작품이었어요. 국전은 1971년부터 구상과 추상을 분리해서 심사하기 시작했는데, 그 첫해에 반 추상작품을 구상 분야에 제출했더니 낙선을 했어요. 커다란 충격을 받았어요. 입선조차 못 할 줄은 몰랐거든요. 내 그림의 갈 방향을 추상으로 명백히 해야겠구나 생각했지요. 빨리 개인전을 열어서 내 세계를 보여줘야겠다고 결심한 것도 그 때문이에요.

◇국전의 추상과 구상 분리 심사제도가 추상 작업을 가속화시킨 것으로 이해할 수 있겠네요?

추상 작업을 좀 더 확실하게 밀고나가는 계기가 된 것이죠. 그래서 1976년에 첫 개인전을 열었어요 추상계열의 작품들이었어요. 평론은 대학 때 미학강의를 들은 인연으로 유준상 선생님께 부탁을 드렸더니 흔쾌히 써주셨어요. 인사동 미술회관 1층이 전시장이었는데, 운이 아주 좋았어요. 마침 2층에서 정관모 선생님이 전시를 하셨는데, 그 전시에 들른 이일 교수님이 조선일보 미술 월평에 제 작품을 호의적으로 언급해 주셨거든요.

정 선생님 전시에 들른 분들이 제 전시에도 들러주셔서 관람객도 많았어요. 어쨌거나 첫 전시회 이후로 저는(한국화가 송수련,한지화가 송수련,송수련 화백,宋秀璉,SONG SOO RYUN,송수련 작가,Hanji Painter SONG SOO RYUN,한지작가 송수련,종이회화 송수련,여류중견화가 송수련, KOREA PAPER ARTIST SONG SOO RYUN, KOREAN PAPER ARTIST SONG SOO RYUN) 3년에 한 번씩은 꼭 개인전을 열겠노라 결심했고, 지금까지 이 약속을 지켜왔습니다.

△글=박철화, 중앙대학교 예술대 문예창작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