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89년 권영우, 최만린, 이신자 작가

◇그런데 추상 작업은 오히려 권영우 선생님의 영향이라고 알려져 있지 않나요?

물론 권 선생님에게서 가장 오래 많은 영향을 받았지만, 제가 재학할 동안은 선생님께서 주로 인물화를 가르치셨고, 누드화수업을 이끌어나가셨죠. 선생님과 가까워진 것은 오히려 졸업한 뒤라고 할 수 있어요.

대학교 4학년 때, 운이 좋게도 전국 단위의 공모전에서 동양화부 수석을 했는데, 별 생각 없이 같은 그림을 졸업 전시회에 걸었어요. 그랬더니 선생님께서 “같은 그림을 여기저기 내느냐?”고 지적하셨는데, 그게 마음에 걸렸어요.

자신의 작업에 대해 엄격하고 철저해야 하는구나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어요. 그러고는 대학원 논문심사 때도 심사 뒤에 선생님을 모시고 나올 기회가 있었는데, 여성이라는 조건이 작가에게 손해가 될 수도 있지만 그래도 작업을 하는 데 있어 생활을 위해 타협을 하지 않을 수 있는 점도 있다고 하시더군요.

그 당시 한국사회가 대중사회로 접어들면서 작품이냐, 상품이냐?'라는 이분법적인 논란이 불거져 나왔거든요. 선생님의 말씀을 들으며 작가로서의 자세를 바로잡을 수 있었어요. 그래서 권영우 선생님 댁을 찾아가게 되었지요. 선생님과의 인연은 그때부터입니다.

▲ 관조, 168×134㎝, 1994

◇그러니까 실제 작업에 끼친 영향보다는 예술가로서의 자세 같은 것을 배우셨군요?

그렇죠. 워낙 엄격하고, 작가로서 자기를 만들어나가는 일에 있어서 철저하신 분께서 프랑스로 가신 뒤에는 작업실을 물려받아 쓰는 행운도 누렸죠. 한쪽에 걸린 선생님의 작품을 보면서 제 스스로를 다 잡곤 했거든요. 결혼과 출산 때문에 자칫 흐트러질 수도 있던 때에 보이지 않게 제 곁을 지켜주신 거예요.

이라 정말 커다란 가르침을 얻었어요. 선생 또 선생님과는 잊지 못할 여행을 함께 다니기도 했어요. 선생님 부부를 모시고 러시아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탄 적도 있고, 정식 수교 전에 중국에 다녀오기도 했지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모스크바까지 이어진 시베리아횡단열차는 가도 가도 끝없는 평원을 달리는 것이었는데, 그 풍경 속에서 선생님으로부터 그림과 인생에 대해 전해들은 이야기는 정말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자산이에요.

중국 여행도 마찬가지인데, 함경도 출신인 선생님은 용정에서 중학교를 다니셨거든요. 그래서 연변을 거쳐 백두산 등정을 했어요. 수교 전이라 한국 관광객이 많지 않았는데, 정말 경이로운 풍경이었어요. 백두산 천지에 구름의 그림자가 흘러가는 모습과 함께 물의 빛깔이 급격하게 변하던 풍경은 지금도 생생해요.

어쨌거나 절대로 흐트러지지 않는 선생님 곁에서 작가로서의 엄격하고 강인한 자세를 늘 되새기게 됩니다.

▲ 1988년 오금동 작업실에서

◇안상철, 권영우 두 분 선생님과의 인연은 작품세계의 상관성에서 충분히 가늠할 수 있으나 소정 변관식 선생님과의 인연은 좀 덜 다가오네요.

소정 선생님은 술을 좋아하셔서 언제나 얼굴이 불과한 상태로 지팡이를 짚고 수업에 들어오셔서 강의를 하셨어요.

한 번은 강의시간에 바위를 배경으로 물이 떨어지는 폭포를 그렸다니 선생님께서 좋아하셨어요. 바위가 힘 있어 보인다고 칭찬을 하신 거죠. 꼭 그 때문만은 아니 지만 전통회화 가운데 산수화에 관심이 많이 갔어요. 그래서 소정 선생님께 배우고 싶어서 몇 번 시도를 했죠.

그때 열심히 노력하라며 선생님께서 제게(한국화가 송수련,한지화가 송수련,송수련 화백,宋秀璉,SONG SOO RYUN,송수련 작가,Hanji Painter SONG SOO RYUN,한지작가 송수련,종이회화 송수련,여류중견화가 송수련, KOREA PAPER ARTIST SONG SOO RYUN, KOREAN PAPER ARTIST SONG SOO RYUN)체본을 그려주시기까지 해서 지급도 그것을 보관하고 있습니다.

자연에 대한 관심, 자연과의 교감이란 점에서 산수화는 매력적인 장르에요. 그런데 불행하게도 소정 선생님께 충분히 배우지는 못했어요. 지금도 많은 아쉬움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분의 갈필작업을 통해 우리 자연의 강렬한 에너지를 조형언어로 끌어 들일 수 있는 가능성을 보았습니다.

△글=박철화, 중앙대학교 예술대 문예창작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