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 경제 1세대가 역사속으로 사라지고 있다. 출처=갈무리

[이코노믹리뷰=최진홍 기자]

대한민국 산업화 주역들 역사속으로
각계 애도의 메시지 쏟아져
거인의 빛과 그림자 눈길

신격호 롯데그룹 명예회장이 19일 노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99세. 장례는 롯데그룹장이며 발인은 22일 오전 6시다.

신 회장의 별세로 대한민국 경제의 주역인 창업 경영인 1세대는 모두 역사속으로 사라지게 됐다. 실제로 글로벌 무대를 호령하는 삼성의 토대를 마련했던 이병철 삼성회장을 비롯해 정주영 현대회장, 구인회 LG회장, 최종현 SK회장과 김우중 대우회장 모두 무대에서 퇴장하며 대한민국 경제역사의 거인들은 '신화'로 남게 됐다.

▲ 이병철 회장이 보인다. 출처=갈무리

글로벌 삼성의 시작, 이병철 삼성회장(1910년 2월 - 1987년 11월)
이병철 회장은 대한민국 경제의 산증인이다.

그는 1910년 2월 12일 경상남도 의령군에서 태어나 중동고등학교를 거쳐 일본 도쿄로 유학을 떠나 와세다대학교 정치경제학과에 진학하지만, 이내 귀국해 한동안 아버지의 지원으로 방황의 세월을 보낸다.

경제인으로서의 그의 전설은 1936년 마산에서 협동정미소 창업을 시도하며 시작된다. 이어 1938년 3월 대구에서 자본금 2만원으로 삼성상회를 설립했으며 대구 특산품인 능금과 동해의 건어물을 중국과 일본, 동남아시아에 수출하며 몸집을 불린다. 한국전쟁이 끝난 후 1953년 현 CJ그룹의 전신인 제일제당을 설립했으며 1954년 제일모직도 설립해 승승장구하기 시작한다. 이 때부터 본격적으로 사업보국(事業報國)의 기치를 내세워 격변의 시기를 온 몸으로 견뎌내는 불굴의 경영인으로 거듭난다.

그에게도 시련은 많았다. 실제로 박정희 대통령이 집권한 후 부정축재자 1호로 몰려 일본으로 대피하는 일이 벌어졌으나 이내 경제 성장이라는 큰 틀에서 의기투합해 간신히 위기를 넘기는 일도 있었다. 또 숙원이던 비료공장(한국비료공장) 설립 과정에서 소위 사카린 밀수사건이 터지는 바람에 고초를 겪기도 했다. 결국 이 회장은 한국비료공장을 국가에 헌납하고, 이 과정에서 청와대 투서 사건에 연루된 것으로 알려진 장남 이맹희와 차남 이창희가 후계구도에서 완전히 밀리는 일도 벌어졌다.

현재 삼성의 핵심 계열사인 삼성전자의 설립도 이 회장의 혜안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도 아픔은 있었다. 구인회 LG그룹 회장과의 불화다.

두 사람은 어린 시절부터 어울리며 학교가 끝나면 논밭으로 뛰어나가 개구리를 잡고 흙장난을 치며 우애를 다졌다. 이후 장성한 두 사람은 현재 KBS2TV의 전신인 동양방송을 공동으로 설립했으며 이 창업주의 차녀 이숙희 씨와 구 창업주의 삼남인 구자학 씨가 백년가약을 맺으며 사돈을 맺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삼성전자가 LG전자가 이미 선점한 전자업계에 진출을 선언하며 두 사람의 관계는 삐걱였다는 것이 정설이다. 실제로 이맹희 전 제일비료 회장은 저서를 통해 1968년 두 사람이 안양골프장에서 만나 삼성의 전자업계 진출 문제로 다퉜으며, 두 기업의 전자업계를 둘러싼 신경전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이병철 회장의 일생은 '혜안의 경영인'이라는 키워드로 설명이 된다. 삼성전자 설립에 대한 의지가 확고해지자 그는 삼성물산의 젊은 인재들을 발탁해 개발부를 신설하는 한편, 당시에는 고가로 여겨지던 흑백TV 개발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다. 나아가 일본으로 건너가 재계의 거물인 이우에 토시오 산요전기 회장을 만나 협력방안을 모색했으며 국내로 돌아온 직후 대규모 공장설립에 나섰다. 원래 계획했던 것보다 13만 2000㎡나 넓은 148만 5000㎡의 부지였다.

수원시 매탄동에 대규모 공장부지를 조성하자 당시 여론은 '삼성이 부동산 투기를 한다'로 좁혀졌다. 심지어 일본 업체인 산요를 끌어들여 민족자본을 말살하는 매판행위를 시도한다는 마타도어도 성행했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생각을 밀어붙였고, 이는 현재의 글로벌 최고기업 삼성전자의 역사로 이어졌다.

이 회장은 몇 번의 은퇴와 복귀를 거친 후 1987년 11월 19일 세상을 등진다. 후계자였으나 청와대 투서사건 등으로 밀려난 장남 이맹희 전 제일비료 회장과는 끝내 화해하지 못했으나, 2015년 8월 별세한 고 이맹희 회장이 이승의 마지막 행선지로 택한 곳은 '아버지'였다. 당시 이맹희 회장을 실은 운구 차량은 장충동 자택에서 10분간 머문뒤 장지인 경기도 여주로 떠났으며, 이곳은 이병철 회장이 생전에 자주 머물던 곳이다.

▲ 정주영 회장이 발언하고 있다. 출처=갈무리

불굴의 경영인, 정주영 현대회장(1915년 11월 - 2001년 3월)
"임자, 해봤어?"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은 불굴의 경영인이다. 한국 경제의 전설이자 꺾이지 않는 투지의 화신이며, 무엇보다 수동적인 한국 경제의 체질을 능동적인 도전의 역사로 변화시킨 장본인이다.

1915년 11월 강원도 통천군에서 태어난 정 회장은 지금의 초등학교에 해당되는 송전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고향에서 청년기를 보낸 후 무작정 가출해 서울 신당동의 쌀가게 '복흥상회(福興商會)'에서 일하게 된다.

특유의 성실성을 인정받은 그는 3년 만에 자기의 쌀가게를 열었으나 이후 상점을 정리, 1940년 아도서비스라는 자동차 정비공장을 연다. 한국을 대표하는 전설의 경영인 정주영 회장과, 현대자동차의 시작이다. 청년 정주영은 아도서비스를 열어 순조로운 경영을 이어갔으나 불의의 화재, 이어진 일제의 기업정비령이라는 날벼락을 맞아 석탄운반업을 시작한다. 이어 해방이 되자 서울 중구 초동의 적산지를 불하받아 1946년 현대자동차공업사를 설립한다.

정 회장의 뚝심경영은 조선업에서 빛을 발한다.

1971년 영국, 가난한 동양의 나라 대한민국에서 온 신사는 5만 분의 1 백사장 지도와 함께 500원 지폐를 펼쳐보였다. 그는 자기를 호기심 반, 불신 반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을 향해 말했다. "이 돈에 그려져있는 것이 철갑선 거북선이라는 배요. 우리는 1500년대에 이미 철갑선을 만든 실적과 두뇌가 있소. 영국 조선의 역사는 1800년대로 알고 있소. 우리가 300년 앞섰다는 뜻이요.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이 말입니다"

한국전쟁으로 나라 전체가 폐허가 된 것이 불과 20년 전 일이다. 아직은 전 국민이 허리띠를 조이며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에 벅차할 시기, 고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은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여겼던 마포 조선소 건립에 나섰다. 문제는 자금. 이에 그는 영국으로 날아가 차관 협상을 벌이며 임진왜란의 영웅 이순신 장군의 거북선이 그려진 지폐를 빼들었다. 그의 승부수는 통했을까? 1974년 6월 28일 현대중공업 울산조선소 준공식 겸 1, 2호선 명명식이 TV로 전국에 생중계됐다. 부침의 역사를 겪고 있으나, 세계를 호령하는 한국 조선업계의 전설이 시작되는 순간이다. 그가 바로 정주영 회장이다.

정주영 회장은 자동차, 조선업은 물론 중동붐을 타고 불어온 한국 건설업의 중흥기를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또 1988년 서울올림픽 유치에 큰 공을 세웠으며 정치에도 많은 관심을 보였다. 통일민국당을 조직했으며 14대 대선에도 출마했다. 그러나 대선에서 낙마한 후 비자금 사건 등이 터지며 최대의 위기를 맞았고, 이후로는 대북사업에 집중하기 시작한다. 1998년 6월 소 500마리를 이끌고 판문점을 넘는 이벤트를 통해 전 세계의 관심을 받았으며, 당시의 대북사업은 지금도 범 현대가의 DNA에 아로새겨져 있다.

정 회장의 말년은 자녀와 관련된 문제로 특히 어려웠다. 그룹의 형제들이 기업의 지분을 두고 다투는 현상을 말하는 '형제의 난'이라는 단어가 처음 만들어진 것이 현대가일 정도다. 그러나 정 회장이 한국 경제의 거목이자 불굴의 경영인이라는 역사는 퇴색되지 않는다. 그는 이사회, 전문경영인 중심의 투명한 경영을 당부한 직후인 2001년 폐렴증세로 별세한다.

▲ 구인회 회장이 보인다. 출처=갈무리

인화의 경영인, 구인회 LG회장(1907년 8월 - 1969년 12월)
LG는 '인화'로 대표되는 기업문화와 특유의 유교적 가풍이 결합되어 보수적인 분위기가 강한 곳이다. 장자승계원칙이 지켜지는 상황에서 여성을 경영 최전선에 배치하지 않는다. 거의 대부분의 대기업들이 승계구도 과정에서 유혈이 낭자한 칼부림이 벌어지지만 LG가 무풍지대로 남을 수 있었던 배경이다. 그 시작은 LG의 뿌리, 구인회 회장에 있다.

구 회장은 1907년 경상남도 진주부에서 태어나 1926년 서울 중앙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지수협동조합의 이사로 취임한다. 이어 1931년 동생 구철희와 함께 구인회 상점을 세우며 본격적인 경영인의 삶을 살게 된다. 일제강점기 시절 독립운동자인 안희제에게 1만원을 전달하며 현재의 '독립군 기업 LG'라는 명성이 시작된 것도 이 즈음이다. 구 회장은 이어 1944년 운수업에 진출한 후 1945년 미 군정으로 허가받은 무역업 1호업체인 조선흥업사를 설립한다. 이어 빗과 비누, 치약 등 생필품 중심의 제품을 연이어 출시하며 큰 성공을 거두게 된다.

구 회장은 인화경영, 정도경영을 내세우며 국내 재계 역사에 신선한 충격을 안긴 경영인으로 평가된다. 특히 유교적 문화에 입각해 내부의 진통이 없고 서로 화합해 그룹을 끌어가는 사풍을 시도한 점이 높은 평가를 받는다.

LG가 걸어온 길에 답이 있다.

실제로 구인회 회장이 별세한 후 동생인 구철회 락희화학 사장은 동생들과 조카들을 불러 자신은 경영승계에 관심이 없다는 점을 분명히 밝히며 창업주의 아들인 구자경 부사장이 그룹을 맡아야 한다고 못 박았다. LG의 장자승계원칙이 자리잡는 배경이다.

구자경 회장은 대한민국이 나아가야 할 길은 ‘기술강국’이 유일하다는 지론을 통해 최첨단 기술개발과 현장의 ‘땀방울’의 조화를 초구한 경영인으로 잘 알려져 있다. 국내 민간 기업으로는 최초로 기업을 공개해 선진경영을 도입했다는 평가도 받으며 무엇보다 직원들과 어울리는 삶을 살았다는 평가다. 럭키크림 생산을 담당하면서 직원들과 구슬땀을 흘리며 손수 가마솥에 원료를 붓고 불을 지펴 크림을 만들었던 일화는 지금도 회자된다. 허름한 야전점퍼에 기름을 묻히고 일을 마치면 직원들과 막걸리를 마시러 다니는 그를 두고 외부인들은 창업주의 아들로 생각하지 않았다는 말도 전해져 내려온다. 이 모든 것은 아버지 구인회 회장의 경영철학과 맞닿아 있다.

구자경 회장에서 구본무 회장으로 이어지는 승계구도도 깔끔했다. 1995년 2월 구자경 회장은 나이 70이 되던 해 경영권을 당시 50대이던 장자 구본무 부회장에게 넘긴다. 장자승계원칙에 칠순은퇴라는 원칙이 더해지는 순간이다. 나아가 구본무 회장도 "좋은 사람이 나타나면 당장 10년 후라도 물러날 수 있다"는 말로 칠순은퇴원칙을 염두에 두기도 했다. 지금의 구본무 회장 체제에서도 이러한 패턴은 반복됐다. 일각에서는 유교문화, 장자승계원칙 등이 지나치게 고리타분하고 경직된 문화라는 지적도 나오지만 구인회 회장이 내세운 '화합의 경영'이라는 화두에 큰 의미가 있다는 것은 대부분의 업계가 동의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재계에서는 피바람이 난무하는 국내 경제계에서 거의 유일하게 '아름다운 화합'을 강조하고, 탁월한 경영감각으로 글로벌 LG의 틀을 세운 구인회 회장을 '최고의 기업인'으로 추대하기에 부족하지 않다는 평가가 나온다. 구인회 회장은 1968년 연암문화재단을 설립한 후 이듬해인 1969년 12월 뇌종양으로 타계한다. 아들인 구자경 회장은 지난해 12월, 손자인 구본무 회장은 2018년 5월 타계했다.

▲ 최종현 회장이 홀로그램으로 구현되고 있다. 출처=SK

아름다운 회사, 최종현 SK회장(1929년 11월 - 1998년 8월)
최종현 회장은 1929년 경기도 수원군에서 태어나 1952년 서울대학교에 재학 중 미국 유학을 떠난다. 이후 귀국해 1962년 형인 최종건 회장이 일군 선경직물 이사를 맡으로 본격적인 경영인의 길에 나선다.

최종건 회장은 1973년 11월 48세의 이른 나이에 세상을 뜨며 동생인 최종현 회장에게 경영권을 넘기고, 기회는 빠르게 찾아온다. 1975년 1차 석유파동이 벌어지며 한국이 석유수출금지국으로 분류되자 정부가 중동 국가와 긴밀한 협력을 다지던 최종현 회장을 불러들였기 때문이다. 최 회장은 사우디아라비아로 급파해 정부의 고민을 해결하고, 그 공로로 본격적인 외연 확장에 나서기 시작한다.

최종현 회장의 빼놓을 수 없는 업적이 바로 ICT 사업에 대한 혜안이다. SK텔레콤을 일구며 그룹의 성장 동력을 확보하는데 주력했기 때문이다. 한국이동통신을 인수한 후 CDMA 상용화 정국에서 성공한 SK텔레콤의 전설이 바로 최종현 회장의 손에서 시작됐다.

최종현 회장은 국내 경제계에서 '아름다운 회사'를 지향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인화의 LG와 비슷한 구석이 많다. 특히 승계구도에 있어 잡음이 없었다. 최종현 회장이 별세할 당시 형이자 창업주인 최종건 회장의 아들이 아닌, 자기의 아들인 최태원 회장에게 경영권을 넘겼으나 최태원 회장의 사촌들이던 최신원 SK네트웍스 회장과 최창원 SK디스커버리 부회장이 오히려 전면에 나서 최태원 회장에게 힘을 실어주는 일이 벌어질 정도였다. 현재의 최태원 회장이 보여주고 있는 기업의 사회적 가치, 행복한 기업의 핵심 DNA는 바로 최종현 회장의 손에서 시작된 셈이다.

직원들과 친밀하게 협력해 비전을 달성하려는 특유의 품성도 회자된다. 이는 아들인 최태원 회장으로 이어져 지금의 SK정신으로 발전했다.

최종현 회장은 마지막까지 나라 걱정을 멈추지 않았던 진정한 애국경영인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병마와 싸우던 1997년 학자들을 미국으로 대거 초청해 토론회를 열어 한국 경제의 길을 모색했으며, 1997년 끔찍한 외환위기를 미리 예견하고 힘겹게 청와대로 달려가 당시 김영삼 대통령에게 경고했던 일화도 유명하다. 1998년 폐암으로 별세하며, 전국경제인연합회장으로도 활동했던 거물급 인사지만 소박한 삶을 지향했다는 점도 알려져 있다.

최종현 회장은 최근 20년의 세월을 넘어 다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지난해 8월 최종현 SK 회장을 기리는 추모 행사가 열린 가운데 현장에서 홀로그램으로 구현된 최종현 회장이 아들인 최태원 회장을 만나기도 했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제 자신이 훌륭한 경영자라는 것은 아직 입증하지 못했으나 아버지가 훌륭한 경영자임은 입증된 것 같아 기쁘다”면서 "SK가 이만큼 성장한 것 자체가 선대회장이 훌륭한 경영인이셨다는 점을 증명한다. 선대회장께서 당신 사후에도 SK가 잘 커나갈 수 있도록 뿌리내려주신 덕분에 가능했다"고 말했다.

▲ 김우중 회장이 글로벌 행보를 보이고 있다. 출처=대우

진정한 세계인, 김우중 대우회장(1936년 12월 - 2019년 12월)
김우중 회장은 1836년 대구에서 태어나 경기고와 연세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한국전쟁 당시 납북된 부친은 대구사범에서 교편을 잡았으며, 박정희 전 대통령의 은사로도 잘 알려져 있다.

1960년 한성실업에 입사한 김 전 회장은 1966년까지 일하다 1967년 트리코트 원단생산업체인 대도섬유 도재환씨와 의기투합해 자본금 500만원, 직원 5명으로 대우실업을 창업했다. 대우(大宇)라는 사명은 대도섬유의 대(大)와 김우중의 우(宇)를 따서 만들었다. 이어 1970년 대우실업 사장 자리에 오르며 본격적인 경영인의 길에 들어선다.

김우중 회장은 진정한 세계인, 글로벌 경영자로 잘 알려져 있다. 한국 기업으로는 처음으로 호주 시드니에 해외 지사를 건설했고 1975년 종합상사 르네상스 시대를 풍미했다. 1976년 에콰도르, 1977년 수단, 1978년 리비아에도 연속적으로 진출했다. 세계경영의 시작이다. 1981년부터 대우그룹 회장이 된 고 김우중 회장은 198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소비에트 연방의 해체로 동유럽이 몰락하자 세계경영에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현지에 공격적으로 자동차 공장을 건설하거나 인수하며 1998년 말 기준 무려 396개의 현지 법인을 운영하는 글로벌 기업이 됐다.

김 회장의 글로벌 경영은 끝이 없을 것처럼 보였으나, 1997년 외환위기와 함께 위기가 시작됐다. 서울올림픽 조직위원회 위원, 한국섬유산업연합회장, 세계경제포럼(WEF)의 자문위원 중 유일한 아시아인, 전국경제인연합회장을 거치며 승승장구했으나 1998년 대우차 제너럴모터스 합작추진이 물거품으로 돌아간 후 그룹 전체가 급격하게 흔들렸고 금융당국의 기업어음 발행한도 제한 조치, 회사채 발행제한은 결정타를 날렸다.

대우그룹은 41개 계열사를 4개 업종, 10개 회사로 줄인다는 구조조정을 발표했으나 유동성 악화에 따른 위기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결국 대우그룹은 1998년 8월 채권단 워크아웃 절차를 밟으며 해체되고 말았다. 이 과정에서 김 전 회장은 분식회계를 주도한 혐의로 1심에서 징역 10년, 추징금 21조4484억원을 선고받았으나 대법원에서 징역 8년 6개월, 벌금 1000만원, 추징금 17조9253억원을 선고해 2006년 복역한 후 2008년 1월 특별사면됐다. 김우중 회장을 두고 부침의 경영인이라는 수식어가 나오는 이유다.

김 회장은 출소 후 베트남으로 건너가 후진양성에 집중한다. 그리고 지난해 12월 9일 숙환으로 별세했다. 특별한 유언은 없었다.

재계에서는 김 회장을 진정한 세계 경영인을 꿈꿨던 거인으로 평가한다. 국내 기업의 글로벌 시장 진출 역사에서, 김 회장의 대우는 가장 윗 자리를 차지하기에 부족하지 않다. 저서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에서 강조한 대로 세계경영을 꿈꿨던 경제계의 거물이자 대표적인 1.5세대 기업인이면서 '샐러리맨 신화'로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김 회장이 무리한 투자와 외환위기의 공포를 읽어내지 못했다는 점은 아쉽다는 말도 나온다. 부침의 세계 경영인, 김우중 회장의 빛과 그림자다.

▲ 신격호 회장이 입국하고 있다. 출처=롯데

맨손으로 일어났다, 신격호 롯데회장(1921년 11월 - 2020년 1월)
신격호 롯데 회장은 말 그대로 맨 주먹으로 일어나 역사를 일군 경영인이다.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홀수 달은 한국에서, 짝수 달은 일본에서 보낼 정도로 동분서주해 '대한해협의 경영자'라는 별명도 가지고 있다.

1921년 경상남도 울산군에서 태어난 신 회장은 1941년 일본으로 밀항해 한동안 우류배달이나 공사판에서 일하며 돈을 모으고, 밤에는 야학을 통해 경영지식을 쌓는다. 그 특유의 성실함을 인정받은 그는 1944년 일본인 하나마츠로부터 5만엔을 빌리는 것에 성공해 자기의 사업을 시작한다. 그러나 태평양 전쟁 당시 미군의 폭격을 맞아 공장이 파괴되며 그는 나락으로 떨어지고 만다.

신 회장은 무너지지 않았다. 그는 1946년 비누 등을 판매하는 공장을 다시 설립해 큰 성공을 거두고 본격적인 '껌' 생산에 나선다. 여기서 소위 대박이 났다. 당시 간판주자인 하리스를 완벽하게 누른 신 회장은 캔디와 초콜릿 등 연이어 히트상품을 내면서 승승장구한다. 이후 1965년 한일협정으로 한국과 일본의 국교가 정상화되자 고국으로 보폭을 넓혀 1973년 롯데호텔 설립에 나서는 등 광폭행보를 이어간다. 1980년대 초반부터는 그룹의 외연을 넓혀 식음료를 넘어서는 종합 엔터테인먼트 회사로 탈바꿈시킨다. 모두가 반대했으나 기어이 롯데월드를 성공시켰고, 최근에는 초고층 빌딩인 롯데월드타워의 꿈 직전까지 갔다.

신 회장의 말년은 그러나 평안하지 않았다. '건강에는 자신이 있는 고령의 경영인'이라는 수식어를 바탕으로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공격적인 행보를 보여줬으나 소위 롯데판 왕좌의 난에 휘말리고 만다.

신 회장의 일생은 파란만장한 도전의 역사며, 한국과 일본 사이에서 벌어진 애증의 역사를 투영시킨 거울을 닮았다. 그러나 그 어떤 경영인들보다 감성적인 인물이라는 평가도 있다. 롯데라는 사명 자체가 괴테의 소설인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히로인 샤롯데를 자신의 이상형으로 보고 회사 이름 모티브로 삼았을 정도다.

물론 여기에는 반론도 있지만, 문학의 영역인 샤롯데의 감성에서 대한해협을 경영한 불굴의 경영인이 탄생한 것은 그 자체로 신 회장의 입체적인 모습을 잘 보여준다는 말이 나온다. 

한 때 문학을 사랑해 작가를 꿈꿨던 거인은 2015년 7월 일본 롯데홀딩스 회장직에서 해임되고 명예회장이 됐으며, 아들들의 완전한 화해를 보지 못한 체 19일 노환으로 별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