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능력이란 그렇게 극단적인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가 하고 있는 일에 정열과 의욕을 가지면 상황도 유리해지고 올바른 해결책도 나오기 마련입니다”

▲ 롯데그룹의 창업주인 故신격호 명예회장. 출처= 롯데그룹

[이코노믹리뷰=박정훈 기자] 조선인에 대한 온간 모멸과 차별이 만연하던 일제 강점기, 신격호 명예회장은 어떻게든 성공해서 조국으로 돌아오겠다는 일념으로 23살의 젊은 나이에 일본으로 건너가 온갖 고생 끝에 제과기업 ㈜롯데로 큰 성공을 거뒀다. 1965년 한국과 일본의 수교 이후인 1967년 신격호 회장은 꿈에도 그리던 고국에 돌아와 롯데제과를 세웠고 이 회사는 신 회장의 진두지휘 아래 식품·유통·관광·석유화학 등 전방위로 사업을 확장시킨 대한민국 재계순위 5위의 대기업 ‘롯데그룹’으로 성장한다. 그의 일생은 그야말로 ‘노력해서 도전하는 이에게 불가능은 없다’라는 메시지를 모두에게 증명한 삶이었다.  

편견과 차별을 성실성으로 이겨내다  

신격호 명예회장은 1921년 10월 4일(음력) 경남 울산 삼남면 둔기리에서 5남5녀 중 장남으로 로 태어났다. 조선인에 대한 멸시와 천대가 기본이었던 일제강점기. 항상 더 큰 배움을 늘 열망하던 청년 신격호는 1942년 부관 연락선에 몰래 몸을 싣고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에서 신문과 우유배달 등 아르바이트를 하며 힘겨운 고학생활을 시작했다. 

일제강점기 일본 사회에서 ‘조선인’으로 살아가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하루하루 목숨을 건 처절함이 아니면 버텨낼 수 없는 역경이었다. 그러나 청년 신격호는 특유의 성실성으로 수많은 일본인들을 감격시켰고 평소 그의 성실성을 오랫동안 지켜 본 일본인 투자자 ‘하나미쓰’에게 당시 돈 5만 엔이라는 큰 돈을 출자 받아 1944년 커팅 오일을 제조하는 공장을 세우고 경영인으로서의 첫발을 내 딛는다.

그러나 이 시기는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시기였고 미국 전투기의 폭격을 받은 신격호 회장의 일본 공장을 첫 가동을 하지도 못한 채 문을 닫게 된다. 이에 그는 한 번 더 도전해 성공을 거두지 못하면 목숨을 버릴 각오로 하나미쓰를 다시 찾아가 투자금을 융통했고 그에 대한 신뢰가 두터웠던 하나미쓰는 다시 한 번 신격호 회장에게 큰 돈을 투자한다. 이후 재기에 성공한 신격호 회장은 투자를 받은 후 일 년 반 만에 빌린 돈을 모두 갚고 고마움의 표시로 하나미쓰에게 집을 한 채 선물했다. 

2차대전 후 미군들에 의해 일본에도 전파된 ‘껌’이라는 식품에 매료된 일본 소비자들의 성향을 파악해 신 회장은 일본에서도 껌을 직접 제조하는 공장을 짓고 껌 사업에 뛰어든다. 시장의 변화를 제대로 읽은 그의 분석은 적중했고 그가 세운 회사는 드디어 자본금 100만 엔, 종업원 10명의 중견 법인사업체가 된다. 이후 신격호 회장은 대문호 괴테의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여주인공 ‘샤롯데’에서 이름을 딴 ‘롯데(LOTTE)’로 회사의 이름을 바꾼다. 

이후 1961년 신격호 회장은 일본가정에서 손님 접대용으로 흔하게 사용되는 식품으로 일본식 과자인 ‘센베이’에서 ‘초콜릿’으로 대체되고 있는 변화를 읽어 냈고 롯데의 이름을 단 초콜릿 생산을 결단한다. 그러나 초콜릿은 ‘제과업의 중공업’이라고 여겨질 만큼 그만큼 제조공정이 까다롭고 고도의 기술을 요구했기에 당시 롯데의 기술력으로는 생산이 불가능했다.  

그러나 신 회장은 “일본에서 해결이 안 되면 해외에서 기술을 도입하면 되는 것”이라면서 초콜릿으로 유명한 유럽 국가에서 기술자들과 장비들을 들여왔고 이는 일본의 롯데가 종합 식풉브랜드로 부상하는 밑거름이 된다. 이후 롯데는 캔디, 비스킷, 아이스크림, 청량음료 부문에도 진출해 성공을 거둔다. 

▲ 1965년 한일수교 후 고국에 대한 투자를 위헤 입국하고 있는 故신격호 명예회장(왼쪽에서 세번째). 출처= 롯데그룹

한국경제의 대들보 ‘롯데그룹’의 시작  

“새롭게 한국 롯데 사장직을 맡게 되었사오나 조국을 장시일 떠나 있었던 관계로 서투른 점도 허다할 줄 생각되지만 소생은 성심성의, 가진 역량을 경주하겠습니다. 소생의 기업 이념은 품질본위와 노사협조로 기업을 통하여 사회와 국가에 봉사하는 것입니다” 1967년 한국 롯데제과 설립 당시 신격호 롯데 회장 인사말이다. 

일본에서 성공한 사업가가 된 신격호 명예회장은 조국 대한민국에도 롯데와 같은 기업을 설립할 것을 늘 꿈꿔왔다. 1965년 한·일 수교 이후 한국에 대한 투자의 길이 열리자 그는 고국으로 건너와 1967년 롯데제과를 설립해 모국에 대한 투자를 시작하였다. 

한국 롯데제과의 성장에 힘입어 롯데그룹은 1970년대 롯데칠성음료와 롯데삼강(현 롯데푸드)으로 외연을 확장해 국내 최대 식품기업으로 발전했고 롯데호텔과 롯데쇼핑을 설립해 당시에 불모지나 다름없던 국내 유통·관광 산업의 현대화 토대를 구축했다. 아울러 호남석유화학(현 롯데케미칼)과 롯데건설 등으로도 영역을 확장해 국가의 기간산업에도 본격 진출했다. 

수많은 롯데의 성과들 중 롯데가 식품회사의 이미지를 넘어 종합 유통기업으로 발돋움한 것은 특히 우리 기업 역사에 남을 성과다. 당시 전 세계 유통업의 정점은 ‘백화점’이었다. 물론 우리나라도 일제 강점기 때부터 운영되던 백화점들이 있었으나, 대부분 영세했고 운영방식이 근대화 되지 못했다. 이에 신격호 명예회장은 국가 경제의 발전과 유통업 근대화에 앞장서야 한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백화점 사업에 도전한다. 

현재 롯데백화점 본점인 소공동점의 전신인 ‘롯데쇼핑센터’ 건립공사는 1976년 시작해 1979년 12월에 완료됐다. 규모는 연면적 2만7438㎡, 영업면적 1만9835㎡에 지하1층, 지상 7층에 이르렀다. 이는 기존의 백화점들에 비해 최대 3배가 큰 규모였다. 롯데쇼핑센터는 개점 당시부터 고객의 많은 관심과 사랑을 받았으며 이후 우리나라 1위 백화점의 위치를 지금까지 지키고 있다. 롯데쇼핑센터에서 시작된 롯데의 유통업은 지속적으로 사세를 확장해 국내 유통업을 대표하는 기업의 입지를 다졌고 이는 지금의 롯데쇼핑과 롯데e커머스로 이어진다. 

신격호 회장은 기간산업에 투자해 모국의 경제발전에 이바지하겠다는 뜻을 늘 품고 있었다. 이는 과거 일본에 지은 자신의 첫 공장이 제대로 가동 한 번 해보지 못하고 폭격으로 전소된 것을 바라봐야만 했던 신격호 회장의 아쉬움이 담긴 도전이었다. 그는 특히 제철사업에 관심이 많았지만, 정부가 제철사업은 국영화한다는 방침을 정하면서 이러한 희망을 접어야 했다.

1979년 롯데는 호남석유화학을 인수하면서 신격호 회장은 기간산업 운영의 꿈을 이루게 된다.  호남석유화학은 정부가 중화학공업 육성 정책의 일환으로 여천석유화학단지를 조성하면서 설립한 국영기업이었다. 단지조성 후 정부는 호남석유화학을 민영화한다고 발표했고, 롯데는 공개입찰을 거쳐 이를 인수하는데 성공했다. 그해 호남석유화학은 여천단지 내 3개의 공장을 완공하고 고밀도 폴리에틸렌(HDPE), 폴리프로필렌(PP), 에틸렌옥사이드(EO)와 에틸렌글리콜(EG)의 상업생산을 시작하며 우리나라 석유화학산업을 이끌어 나가게 됐다.

호남석유화학은 케이피케미칼 등 국내 유화사와 말레이시아의 타이탄케미칼 등을 인수하며 롯데그룹 성장의 한 축으로 성장했, 2012년 '롯데케미칼'로 사명을 바꾸고 글로벌 화학기업으로 도약하고 있다.

관광입국을 이뤄야 한다  

“한국의 장래를 깊이 생각했습니다. 부존자원이 빈약한 우리나라는 기필코 관광입국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 저의 신념이었습니다” 

롯데호텔 건립에 앞서 신격호 회장이 밝힌 관광산업 진출에 대한 본인의 생각이다. 호텔 사업으로 시작하는 관광사업 진출 구상은 신격호 회장과 롯데그룹에게 있어 대단한 모험이었다. 당시에는 산업기반이 취약한데다 국내에 외국손님을 불러올 국제 수준의 관광 상품도 개발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관광업 자체의 민간투자가 저조한데다 산업정책의 우선순위에서 뒤로 밀려 거의 불모지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부존자원이 빈약한 우리나라는 기필코 관광입국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 신 명예회장의 신념이었다. 

▲ 1987년 롯데물산이 취득한 잠실 부지. 출처= 롯데그룹

롯데는 1973년 서울 소공동에 동양 최대의 초특급 호텔 ‘롯데호텔’을 지음으로 관광산업으로도 외연을 확장했다. 지하 3층, 지상 38층의 고층 빌딩으로 약 1천개 객실을 갖춘 롯데호텔 건설에는 6년 동안 약 1억5000만 달러가 투자됐다. 이러한 신 회장의 결단으로 탄생한 롯데호텔은 2010년 러시아 모스크바에 한국 호텔로는 처음으로 해외 체인을 오픈할 만큼 성장했다.

관광산업은 수많은 이들이 와서 남녀노소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즐길거리’가 필수임을 신 회장은 잊지 않았다. 이에 우리나라 어린이들이 맘껏 뛰놀 수 있는 놀이동산을 짓겠다는 신격호 회장의 꿈은 1989년 서울 잠실의 테마파크 ‘롯데월드’로 구현됐다. 여기에 신격호 회장은 또 하나의 원대한 계획을 동시에 추진한다. 석촌호수 서쪽을 중심으로 건설되는 롯데월드와 함께, 석촌호수 동편을 중심으로 종합관광단지(당시 명칭 제2롯데월드)를 건설해 잠실 지구를 한국의 랜드마크로서 세계에 자랑할 수 있는 복합 관광명소로 키워내겠다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롯데는 1982년 제2롯데월드사업 추진 및 운영 주체로 ‘롯데물산’을 설립하고, 1988년 1월에는 서울시로부터 사업 이행에 필요한 부지 8만6000㎡를 매입했다. 그리고 다음해 실내 해양공원을 중심으로 호텔, 백화점, 문화관광홀 등을 건립하겠다는 사업계획서를 서울시에 제출하였으나 일부 조건 미흡으로 반려되었다. 이후 사업 허가를 받기 위한 지난한 여정이 시작되었다. 각종 교통, 도시계획 등의 이유로 사업계획이 잇달아 반려되었다. 단순한 백화점이나 쇼핑시설, 아파트 등을 건설하면 충분히 사업성이 있는 부지였지만, 신 명예회장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명소를 짓겠다는 일념으로 제2롯데월드의 건설 계획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2011년 지상 123층 높이 555m의 초고층빌딩을 포함하여 80만 5782㎡에 이르는 ‘롯데월드타워’ 전체 단지의 건축 허가가 최종 승인되었다. 공사는 순조롭게 진행되어 2014년 10월 롯데월드몰과 아쿠아리움을 시작으로 시설들이 순차적으로 오픈하였으며, 2017년 4월 3일 롯데 창립 50주년을 축하하며 초고층빌딩을 포함한 롯데월드타워가 오픈했다. 
 
우리나라 최고층 건물이자 최대 규모의 쇼핑몰로 탄생한 롯데월드타워는 고용 창출 및 지역경제 활성화에 이바지하는 한편, 서울의 랜드마크로 외국인 관광객을 유치하며 국내 관광산업 활성화에 앞장서고 있다.

유통업 외에도 소비재, 문화, 건설, 화학, 관광까지 외연을 확장시킨 롯데그룹은 일본 롯데의 경제규모와는 이제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성장했다. 2018년 기준 롯데그룹 전체에서 발생하는 연간 매출은 약 100조원으로 이는 같은 시기 일본 롯데보다 약 24배 큰 규모다.  

대한민국 기업계의 ‘큰 별’  

기업가의 경영 면에서도 신격호 회장은 수많은 후배 경영인들의 귀감이 됐다. “CEO는 회사가 잘 나갈 때일수록 못 나갈 때를 대비해야 합니다. 반대로 실적이 악화될 때는 훗날 좋아질 때를 염두에 두고 투자해야 합니다”라면서 최고 경영진들이 경영에 임하는 마음가짐에 대해 이야기했다. 

아울러 신격호 회장은 그가 살아온 궤적을 통해 우리나라 안에서만 비전이 머무는 기업은 곧 죽은 기업이라는 메시지를 전했다. 그는 “글로벌 기업으로 자리 잡기 위해서는 브랜드의 세계화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라면서 각 계열사의 대표이사들에게 늘 글로벌 단위 사업을 염두하도록 늘 독려했다. 

그의 의지를 이어받아 롯데는 현재까지도 글로벌 기업으로 도약하기 위해 중국, 러시아, 베트남, 인도네시아, 인도 등 사업 영역을 꾸준히 확대해 나가고 있다. 

다만, 신격호 회장의 말로는 그다지 순탄치 못했다. 경영일선에서 완전히 물러나기 직전까지 그룹 경영의 모든 결정권한을 본인에게 집중시켜 놓은 것은 창업주 일가의 경영권 분쟁으로 번졌다. 이에 장남인 신동주 전 롯데홀딩스 부회장과 차남인 신동빈 현 롯데그룹 회장은 '형제의 난'이라고 불릴 정도로 치열하게 경영권을 차지하기 위한 공방전을 벌이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창업주 일가의 사익을 위하는 목적이 다분한 롯데그룹 자본 분배의 흔적이 드러나면서 90이 넘은 나이에 법적 책임을 감당해야 하는 입장에 놓인 것은 신격호 회장의 빛나는 생애의 한 가지 오점으로 남았다.    

그럼에도 신격호 회장이 그의 생애를 통해 이룬 많은 것들은 한국 경제에서 ‘연간 100조원’을 책임지는 대기업 롯데의 막중한 역할로 남았다. 신격호 명예회장의 생애는 과거와 현재 뿐만 아니라 이후에 우리나라를 이끌 기업가들에게도 계속해서 기억될 ‘교과서’가 됐다. 신격호라는 한국경제의 큰 별이 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