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팀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고 생각되는 일이면 저는 할 겁니다. 팀에 조금이라도 해가 된다고 생각하는 일이면 전 잘라내겠습니다. 해왔던 것들을 하면서 안 했던 것들을 할 겁니다. 잘 부탁 드리겠습니다.” 

언제 시작했는지도 모를 드라마였기에 처음엔 그저 그렇고 그런 것들 중의 하나라는 생각으로 지나치기만 했다. 채널을 돌리다가 우연히 눈에 띄었어도 별로 주목할만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마법처럼 빠져들기 시작했다. 별다른 것은 없었다. 앞에 언급한 것처럼 드라마에서 주인공으로 나오는 신임 단장 백승수(남궁민)의 담담한 듯 하면서도 당당한 행보에 끌렸다.

보통의 샐러리맨들이라면 시도할 수 없는 것을 시도하고 행동하고 쟁취했다. 프로스포츠단을 운영해본 경험이 있었기에 동질감도 느꼈다. 무엇보다 만년 꼴찌 팀을 혁신해서 우승팀으로 변모시키고자 하는 것이 마치 내 얘기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드라마가 중반을 접어들면서 언론에서 상승세를 무섭게 타고 있다고 연일 보도가 이어졌다. 씨름, 아이스하키, 핸드볼 팀을 우승으로 이끈 경험은 있으나 야구팀은 처음인 백승수라는 사람이 단장을 맡으면서 팀 체질을 송두리째 바꾸고 있다.

그의 행보 하나 하나는 단호했다. 드라마라서 그렇게 드라마틱하게 그려나갔겠지만 일단 결정된 사안에 대해서는 아래 위 양 옆에서 누가 뭐라고 하든 밀어 부쳤다. 대부분의 행보가 작은 성공들로 이뤄지자 아래에서 먼저 공감했고, 그리고 서서히 그 범위를 넓혀가고 있다. 극 중에서 그는 우물쭈물하는 모습을 보인 적이 없는 것 같다. 생각하고 고민하는 시간을 일부러 극으로 할애할 필요가 없어 그런 것이겠지만, 단호하면서도 작은 성공을 쌓아나가는 그의 모습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샐러리맨들에게는 카타르시스가 되고 있다. 그런 감동에도 불구하고 고개를 돌려 현실을 보면 전혀 그렇지 못하다.

 

고민 같은 거 하지 말고 운동화 신고 끈부터 조여 매라

연초라 그런지 여기저기서 다이어트를 하느니 금연을 하느니 운동을 시작하느니 하며 뭔가를 시작하는 동료 후배들이 있다. 다행인 것은 나처럼 담배는 끊을 생각도 못하는 사람도 있는데, 금연 결심을 하는 사람이 늘고, 주위에서 헬스장을 다니는 사람도 꽤 되는 것 같다. 나도 고갈된 체력을 키우기 위해, 지난해 여름부터 별다른 스케줄이 없는 평일 밤에는 한 시간 남짓 헬스장에서 운동으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일요일 등산을 빼곤 평소에 돌보지 않던 저질 체력의 몸이라, 운동을 갈 때마다 새로 시작하는 듯 운동이 버겁지만, 시작한 뒤로는 헬스장에 갈까 말까를 고민해 본 적은 없다.

비슷한 시기에 운동을 시작한 후배가 거의 매일 같이 나에게 물어본다.

“어제 운동 다녀오셨어요?”

“당근. 너는?”

“갈까 말까 고민하다가 안 갔어요.”

“그걸 왜 고민을 해? 당연히 가야지.”

헬스클럽이 돈을 버는 이유는 몇 가지가 있겠지만, 그 중에서 가장 큰 것은 대폭 할인된 가격에 1년 치를 한꺼번에 등록시키는 것이다. 보통 사람들 중에서 열에 일곱은 첫 달 정도 열심히 다니고 그 담부터는 아예 헬스장에 발을 끊는다. 사람들 심리가 고민을 하게 된다. 오늘은 일이 조금 늦어져서 피곤한데 운동까지 하는 것은 무리라며, 스스로에게 타당한 명분을 준다.

나 같은 경우엔 헬스장 등록을 하기 전에는 많은 고민을 한다. 비용이 적은 곳이 어디인지, 시간을 내서 운동할 수 있을 지 그리고 그 밖의 방해 요소는 없는 지에 대해 몇 날 며칠을 고민한다. 애써 등록을 해 놓고 몇 번 가지 못한다면 시작하지 않느니만 못하기 때문에 출퇴근을 하면서 헬스장 위치며, 이동 동선, 등록비 등등에 대해 차근차근 알아본다. 그리고 고민에 고민을 거듭해 보고 결론이 나면 두 번 다시 고민 같은 것은 하지 않는다. 회의가 있거나 부득이한 사정이 없는 한은 운동하러 가는 것에 대한 고민은 해 본 적이 없다. 퇴근이 좀 늦어도 무조건 들러서 잠깐이라도 운동해야 일과가 마무리된다.

사람들이 내게 일년에 등산을 몇 번이나 다니냐고 물어보면 난 주저 없이 ‘50번 정도’라고 얘기한다. 그러면 사람들이 어떻게 매주 다니냐고 반문하기 일쑤다. ‘산에 왜 그렇게 가냐?’고 묻는다. ‘일단 등산화를 신고 나서서 고민을 한다’고 답한다. 신발을 신고 나서면 어디든 가게 되어 있다. 그게 벌써 십오 년은 된 듯하다. 그렇게 등산은 습관이 되어 버렸다. 운동도 마찬가지다. 가기 전에 갈까 말까 고민을 하게 되면, 가지 않을 이유를 더 찾게 된다. 하지만 일단 헬스장으로 간 뒤에는 어떻게든 운동을 하게 된다.

지금은 인터넷 쇼핑이 오히려 더 많아졌지만, 예전엔 쇼핑을 하기 위해서는 백화점이나 쇼핑몰 아니면 시장으로 일단 갔다. 그런데 거기서 남녀의 차이는 극명하다. 남자가 거기를 가는 이유는 꼭 필요한 뭔가를 구입하기 위해서다. 나 같은 기성세대 남자가 백화점에서 물건을 사는데 걸리는 시간은 총 15분 정도다. 그것도 백화점 입구부터 매장에 들어가서 물건을 고르고 계산하고 나오는 데까지 걸리는 시간이다. 반면 여성은 4~5시간이 넘는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뭘 선택할 지 고민에 물건을 구입하지 못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놀라운 일도 아닌 것이, 예전에 집사람을 따라서 백화점을 갔던 적이 몇 번 있었다. 갈 때마다 다툴 수 밖에 없었다. 물건을 보면서 뭘 사야 할지를 계속 고민하는 것이었다. 백화점 몇 층을 계속 오르락 내리락 하면서 이 매장 저 매장을 계속 둘러보면서 고르고 또 고르는 데에는 진이 다 빠질 지경이었다. “사고 싶은 게 너무 많아서 뭘 사야 할 지를 모르겠어.” 늘 이렇게 말하는 데에 내 대답은 항상 똑 같았다. “그럼 안 사야지.”였다.

그렇게 몇 시간을 보내고 나서야 겨우 살 수 있었는데, 문제는 사고 나서도 마찬가지였다. “괜히 산 것 같아, 아까 본 것이 더 나은 거 같은데”라며 만족해 하질 못했다. “그러면 갖다 줘버려.”라고 말하면 또 불화만 생기기에 그냥 가만히 있을 수 밖에 없다. 어쩌다가 정 못마땅해서 “일단 샀으면 불평 갖지 말고 애착을 가지고 잘 쓰면 되잖아.”라고 얘기했다가 부딪히기만 했다.

 

“회의 때는 합의했는데, 다시 생각해보니 잘 모르겠어!”

조직도 마찬가지다. 큰 일이 닥치기 전에 회사의 수뇌부들이 모두 모여서 마라톤 회의를 하게 된다. 당연히 이런 큰 일을 제대로 돌파해 나가기 위해서는 각 팀에서 맡은 역할들을 충실히 진행해야 하고, 비용이 수반되는 일이 다반사다. 때문에 마라톤 회의에서는 각 국면에서 도출될 수 있는 상황들을 미리 예견하고 언제부터는 무슨 일을 준비하고 진행해 나가기로 합의가 도출된다. 이렇게 제기된 일의 진행 방법론까지도 논의하지만 정작 실행에 들어갈 때면 말이 달라지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가늠하기도 힘들만큼 큰 리스크가 서서히 압박해오고 있던 즈음이었다. 사전 준비를 치밀하게 해 둘 요량으로 몇 가지 선제조건을 실행하기 위해 기안을 해서 결재를 받으러 구조본부장을 찾아갔다.

“이거 왜 해?”

“예? 지난번 회의에서 이미 수 차례 말씀 드렸고 논의 된 내용인데요.”

“알아, 회의 때는 다들 그렇게 하기로 했지. 그런데 꼭 해야 되는 거야?”

“회의 때는 합의 하셨으면서, 하지 말라는 말씀이신가요?”

“글쎄, 회의 때는 그랬는데, 다시 생각해 보니 판단이 잘 서지 않아서 말이야.”

그렇게까지 얘기하는 데에 무리하게 결재를 강요할 수는 없어서, 사인을 받지 못하고 자리로 되돌아 오니, 팀원들 모두가 의아해 했다. ‘지금 결재를 받아서 바로 진행하지 않으면 때를 놓치게 되는데, 나중에 우리 팀만 곤란해지게 되잖아요?’라며 반문들을 해 대는데 뭐라 할 말이 없었다. 결국 구조본을 설득시키기 위해 며칠씩이나 되는 시간을 투자해서 입씨름만 반복했다. 누가 보더라도 당연한 일이고 합의된 사안을 이렇게까지 물고 늘어지는 이유를 알기 힘들었다.

며칠이 지나고 결국 사단이 터졌다. 외부 점심 약속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이었는데, 최고경영진 비서가 급히 호출을 했다. 부랴부랴 책상으로 가서 다이어리며 최근 이슈 몇 가지가 포함된 서류 뭉치를 들고 회장실이 있는 아래층으로 달려갔다. 당도해 보니 비서가 빨리 들어가라고 손짓을 했다. 틀임 없이 뭔가 불길한 일이 벌어질 것이 분명했다. 회장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이미 구조본부장 이하 몇몇 임원들이 두 손을 앞으로 모으고 머리를 조아리고 있었다.

“그 진행 건은 어떻게 돼가고 있어?”

이마에 송글송글 맺힌 땀을 닦을 새도 없이 불호령부터 맞아야 했다. 순간적으로 사태를 짐작하며 상황을 파악한 뒤 조심스레 ‘준비 중’이라고 답을 했다. 자칫 함께 서 있는 누군가를 핑계의 대상으로 삼으면 일이 더 힘들어질 것이라는 것은 그 간의 조직 경험상 당연한 것이었기에 뒤집어 쓸 수 밖에 없었다. ‘귀가 없냐? 그때 회의 때 뭐라 얘기했어?’부터 ‘머리는 장식이냐, 생각이라는 것을 좀 하면 안 되냐?’ 같은 장황한 얘기를 한참 듣고 난 뒤에, 조아리고 있던 본부장이 한 마디 했다.

“최대한 빨리 진행 시키도록 하겠습니다.”

회장실 문을 닫고 나오면서 구조본부장이 ‘그렇게 중대한 사안이었으면 진작에 얘기를 하지’라며 오히려 면박을 줬다. 물끄러미 쳐다보는 나를 보는 겸연쩍은 얼굴이 보였다. 바로 그 자리에서 들고 있던 결재판을 들이밀고 사인을 받았다. 그렇게 또 한 차례 외부로부터 몰려오는 대형 소용돌이를 조금씩 헤쳐나갈 수 있었다. 고민의 대부분은 사실 조직의 실익 때문이라기 보다는 자기 개인의 유불리 때문인 경우가 많다. 책임지기 싫어서 미루기도 한다. 백화점에 아무리 좋은 물건이 많아도 내 것이 아니다. 최고는 바로 내 손 안에 있는 것이다. 일단 손에 쥐었으면 고민하지 말고 최대한 잘 활용하는 길이 곧 최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