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닥터 김사부 2>가 시청률 20퍼센트를 넘겼다고 한다.

사실 의사들은 정작 의학 드라마를 썩 챙겨보지 않는다. 보통 병원 현실과 동떨어져 리얼리티가 부족한 데다, 러브라인 전개에 치중하는 경우가 많아서다. 그런데, 낭만닥터 1편은 재미있게 봤던 기억이 난다. 

의사들이 가운 휘날리며 회진을 도는 모습이 상상되는 대학병원은 사실 갓 의사면허를 딴 새내기 의사를 전공의로 수련시켜 전문의를 만드는 교육병원이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지만, 필자가 S대 병원 성형외과 전공의를 하던 시절 대학병원에서는 교수의 책임 하에 환자에 대한 수술과정의 일부를 전공의가 하는 것이 당연했다.

즉 20여 년 전에는 어떤 외과든, 교수님이 전공의(레지던트)에게 수술과정 일부를 해보도록 하거나, 꿰매고 마무리하라고 시키는 일이 자연스러웠다. 환자 마취 중인 의사도 대개 교수가 아니라 마취과 전공의였다. 마취과 교수님이 몇몇 수술 방을 지휘 감독하며 전공의를 가르치는 식이었다. 이런 식이어야 결국 전공의가 해당과의 임상술기를 배우고 결국 전문의가 되는 것이다.

필자가 전공의 1, 2년차일때, 얼굴뼈 수술이 있는 날은 고역이었다. 교수님이 절골과 고정을 끝내고 나서, 4년차 수석 전공의나 펠로우(전임의)에게 입안절개를 봉합하도록 하면 그 때부터가 문제였다. 1, 2년차는 봉합 수술하는 위 년차를 보조해서 리트랙터(조직을 젖혀서 수술부위를 보이게 하는 기구)를 잡거나 석션을 한다. 이내 분노의 봉합이 시작되고, 니들홀더(바늘을 잡는 기구)를 잡은 위 연차 입에서 “똑바로 제껴[젖혀]” “너 지금 뭐하냐”, “석션해! 안보이잖아”, “너, 나가” 와 같은 모욕적이고 신경질적인 고성이 튀어나오곤 했다. 가끔 육두문자도 나왔다. 전공의 아래 연차들은 손이 무딘 위 연차의 핀잔과 짜증을 피할 수도 대들 수도 없었다. 연차의 위계질서는 확실했다. 여담이지만, 사람은 잘 안 변한다. 20여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분노의 수술을 한다는 소문을 듣고 쓴웃음이 났다. 

물론 젠틀한 집도의도 있었다. 모 과에서 집도의가 화를 못참고 가위를 던졌는데 벽에 꽂혔다는 무협지같은 소문도 있었던 반면, 수술 솜씨도 좋고 매너도 좋아 정년 퇴임할 때까지 수술하다 화내는 걸 아무도 못 봤다는 교수님도 있다.

참고 견딘 필자도 어느새 수석 전공의가 되었다. 필자는 꽤 독사였다. 아래 연차들이 일을 대충 얼버무리거나 늑장 부리거나 펑크를 내는 것에 관대하지 못했다. 독사 밑에서 고생할 것을 대비하여, 군대 먼저 갔다 와서 나보다 나이가 더 많은 아래 연차 전공의들이 필자가 수석전공의인 팀으로 들어왔다. 나이가 필자보다 많으면 덜 독사처럼 굴겠지 하며 머리를 굴려 팀을 짠 것이다. 그 나이 많은 전공의가 몇 달 뒤 필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한 선생님은 수술할 때 정말 화를 안내시네요. 화가 날 만한 상황에서도 잘 참으십니다.

 *  *  *

사실, 필자는 수술할 때 화낼만한 상황을 억지로 참는 것이 아니고, 애초에 화가 별로 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우리가 아주 즐거운 일을 할 때는 뭔가 조금 마음에 들지 않는 주변상황에도 그렇게 화가 나지 않는다. 에메랄드 빛 바다의 해변을 걷는데 날씨가 흐리다면 조금 아쉽긴 하지만 그래도 화를 버럭 낼 일은 못 된다. 햇볕에 덜 타고 좋네 하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만약, 수술이라는 상황에 압박을 받고 자신이 없고 생각대로 되지 않고 스스로의 결정에 나약하다면, 오히려 반대급부로 화가 나고, 도와주려는 사람에게 그 분노를 투사하고, 무서운[이라고 쓰고 성질 더러운 이라고 읽는다] 서전이 된다.

필자는 돌출입수술이나 얼굴뼈의 안면윤곽수술을 할 때 전혀 화가 나지 않는다.

화가 나기는커녕 봄 소풍처럼 즐겁기만 하다. 화를 낸다는 것은 지금 뭔가 안 풀린다는 뜻이고 그것을 수술보조를 하고 있는 남의 탓으로 몰아가고 있다는 뜻이다.

수술할 때 화를 내는 것은 여러모로 바람직하지 않다. 집도의가 화가 나는 상황이라는 것은 따져보면, 그 집도의 자신의 탓이며 환자에게는 분명히 마이너스다. 자기 손이 무딘 것을 남에게 화풀이해서는 안된다. 더구나 얼굴에 아름다운 작품을 만드는 것이 소명인 성형외과 전문의가 흥분하고 분노한 상태로 수술을 하는 것이 과연 합당한가?

 *  *  *

필자가 수술을 할 때 화내지 않고 평온할 수 있도록 가르쳐준 스승이 있다.

다름 아닌 조그만 ‘주사 바늘’이다.

성형외과 전공의를 시작하기도 전의 일이다. 필자가 새내기 의사가 되어 S대 병원에서 인턴으로 근무하는 첫 달, 내게 닥친 가장 큰 시련은 당장 익일 수술을 앞둔 꼬마 환자들에게 정맥주사를 하고 링거액을 달아놓는 것이었다. 다른 몇몇 대학병원은 당시에도 이미 정맥주사 전담 간호팀이 따로 있었는데 유독 S대 병원만 꼭 의사인 인턴이 해야 하는 미션이었다. 

꼬마들은 주사를 할 때 결코 가만히 있어주지 않는다. 보호자에게 꽉 잡고 있으라고 하고 시도를 해보지만 이곳 저곳 바늘을 찌르는 횟수가 늘어날수록 보호자의 표정은 찌푸려지기 시작하고 급기야 역정을 내는 부모도 있다. 자기 아이를 바늘로 찌르는 걸 좋아할 보호자가 누가 있겠냐마는 혈관이 보이지 않거나 보여도 실핏줄 같아서 바늘을 꽂으면 금방 터져버리고 마는 경우는 정말 속수무책이었다. 게다가 수술을 위해 잡는 정맥주사는 혹시 모를 수혈을 대비해서 제일 두꺼운 바늘을 쓴다. 그래서 더 어렵다.

생각해보면, 정맥주사도 하나의 작은 시술이고 집도이다. 칼 대신 바늘을 들어서 그렇지, 잘 하면 환자에게 이득을 주고 잘 못하면 환자에게 고통을 준다. 필자도 처음부터 잘 할 수는 없었다. 갓 의사가 된 자존심은 있고 거듭된 자신의 주사 실패, 즉 실력의 부족을 인정하지 못하거나 드러내기 싫으면 무의식적으로 남 탓을 하게 된다. 분노의 투사다. 보호자를 책망하거나 아이의 혈관이 이상하다고 몰아간다.

첫 한 달 동안 매일 이런 꼬마들의 혈관과 씨름하다가 보니 환자를 통해 배웠고, 어느덧 내 손은 주사를 ‘던지면 들어가도록’ 훈련되고 있었다. (그 때 내게 배움의 기회가 되어준 꼬마들에게 이 지면을 빌어 미안한 마음을 전한다. 하지만 난 최선을 다했고 대학병원에서 인턴, 레지던트의 수련이란 것은 원래 그런 구조이다)

그래서 둘째 달 소아응급실 인턴으로 일할 때는 소아과 1,2년차 전공의들에게 완전히 총애를 받게 되었다. 필자의 백발백중 정맥주사 솜씨 때문이었다. 동료 인턴들이 정맥주사 하나만 해달라고 SOS를 청해오기도 했다.

필자는 어느새 정맥주사를 능숙하게 하면서 전혀 남의 탓을 하지 않는 의사가 되어 있었다. 남 탓할 이유가 없었다. 보호자가 꼬마를 잘 못 잡아도, 아이가 움직여도, 혈관이 약해도, 눈에 보이는 혈관이 없다면 안 보이는 혈관을 촉감으로 만져서라도, 단번에 성공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나만 잘하면’ 정맥주사를 성공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른 것이었다.

그 때 난 깨달았다. 그것이 정맥주사든 더 크고 어려운 수술이든, 남 탓 하고 화내는 것은 자신이 모자란 것을 증명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필자가 화 안내는 서전이 된 것은 바로 이 조그만 정맥 주사 바늘이 가르쳐준 깨달음 덕분이다.

필자는 요즘 1시간이면 끝낼 수 있는 돌출입 수술을 비롯해서, 광대뼈, 사각턱 수술과 같은 안면윤곽 수술을 간호사 단 두 명과 같이 한다. 필자 밑에 인턴도 전공의도, 봉급 의사[페이닥터]도 없으니, 집도를 부분적으로나마 도와줄 사람도 없다. 처음부터 끝까지 필자가 하고 필자가 책임진다.

사실 집도의는 고독하다. 수술대에 나를 믿고 누워있는 환자에 대한 모든 판단과 결정, 수술의 전 과정이 오로지 필자 한 명에게 달려있다. 물론 환자의 미적인 요구를 반영한다. 그런 수술의 과정이 즐겁다. 필자에게 수술은 험난한 등산로가 아니라 꽃이 만발한 산책길이다. 그러니 화 낼 일이 없다. 수술할 때가 즐겁고 행복하다. 환자를 위해서도 그래야만 한다.

마침 오늘 돌출입수술을 앞둔 환자의 정맥주사를 간호사가 몇 번 실패하기에, 필자가 출동했다. 원샷 원킬이었다. 몸이 기억하고 있었다. 간만에 정맥주사 바늘을 잡으니, 한낱 작은 주사 바늘이 준 깨달음에 다시 한번 감사하게 된다.

수술장에서 곧 콜이 올 것이다.

오늘 수술에서는 피아니스트 조성진의 모차르트 론도 A단조를 들으며 꽃길을 산책하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