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색 층이 종래대로 몇 층이라도 겹쳐져 있다. 저 [3년간]의 겹쳐 칠함은 각 층이 완전히 평평해지기 때문에 그 [펼침]은 그곳에서 완결된다. 조금은 관객을 가까이 다가오게 하지 않을 엄격함이 있고 , 또한 그것이 멋이 있었다.
다음은 화면의 이중구조이고 그곳의 [펼침]이 분명히 보인다. 관객은 긴장에서 해방된 상태에서 그것을 맛보는 것이 가능하다. 관객이 그곳에 받아들이는 [해방감]하나의 [가능성] 내지 또 하나의 [긍정]의 감촉 이다. 그렇지만 그것이 반드시 회화의 종래의 회화로 회기 하는 것으로써 만 들어 지는 것이 아니다.
최명영의 극한의 바탕, 고개에서 종래의 회화를 극복해 버린다. 그것을 극복해서 좁은 가능성, 능선이라는 가능성의 길을 걷는 것이다. 좁은 지평 한정된 긍정의 지평 안에서 시도하고 있는 [회화]인 것이다. 이 점을 놓쳐서는 안 된다.
그리는 최명영으로써는 균등히 평평하게 칠한다는 승려의 수행과 같은 제작 방식에 폭이 생긴 것이다. 예를 들어 사경이라는 이라는 경문을 그대로 옮겨 적는 작업이라도 글씨 자체를 자기 나름으로 바꾸어 적는 것은 가능 하다. 결국은 경문을 대신해 자기의 문장으로 되는 일이 벌어 질수도 있다는 상상도 해본다. 그러한 일종의 여유가 균등히 칠해짐으로 자유롭게 보이는 것이다.
저[3년간]의 붓은 수평으로 움직였다면 다음은 수직으로 움직이고 있다. 하지만 사선이나 곡선이 아니고 전체의 구조도 느슨해 지는 것이 아니다. 종과 횡의 붓을 움직이는 것이 가능할 지라도 화가의 신체가 현저히 자유롭게 되는 데에는 상상으로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 자유스러운 느낌 이 작품에 반영되고 넘쳐있다. 그리고 관객도 상호 관여하고 있는 것이다. 정말 괴로울 수 있는 능선의 오르막 내리막길을 도승에게 이끌려 관객도 느긋하게 산을 오르내린다. 느긋하게 오른다고 해도 긴장으로 가득 차있고 그렇게 편안한 길은 아니다.
건조가 빠른 아크릴 물감으로 변한 것으로 겹쳐 칠해도 이전보다도 자유로움이 증가한다. 이전은 한 층을 칠 한다면 그것이 건조될 때까지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번은 화면 전체를 보면서 어느 곳이라도 재량껏 자유롭게 붓을 놀릴 수 있는 것이다. 겹쳐 칠함이 종 방향 혹은 횡 방향이라도 언제라도 자유자제로 된 것이다.
때문에 저 [3년간] 보다는 제작의 방식과 결과도 보다 회화적이 되어 가고 있다. 그런데 이 검정 한지라는 아래층은 [지지체]와[바탕]이 아니다. 그렇지만 그것도 [회화]이고 그리고 그것이 있어야 이중구조가 가져다주는 [펼침]이 생겨나는 것은 이미 앞서 언급했었다.
지지체와 바탕이 아니면 무언가라면 그것은 그 자체의 회화 일부이면서 동시에 회화의 [기저]이기도 한 것이다. 단순한 바닥이 아니라 위의 흰색 층과 마주하는 지평이라는 의미에서[기저]이다. 굳이 도식적으로 말한다면 위에 흰색 층이 [실]이고 아래 검정 층이[허]이다. 그리고 물론 그 역으로도 마찬가지이다. 위의 층의 색채, 자유로운 제작행위, 필치라는 [실]은 아래층 의 [허]에 의해 떠받혀지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아래층의 [허]가 없다면 단순한 회화로 끝나버린다. 역으로 [실]로써 아래층의 그 자신과 정반대의 나타냄을 한 [허]라고 하는 위의 층에 짊어지지 않는다면 [허]로 보이는 [실]자신을 충실하게 표현하기는 어렵다. [회화공간] 이라는 것은 형태와 이야기 혹은 추상적 구성도 아니고 만일 그것이 존재한다고 하면 [허]이자[실]이기도 한 하나의 [펼침]으로써 존재 할 수밖에 없다.
최명영(Dansaekhwa-Korean monochrome painter CHOI MYOUNG YOUNG, Dansaekhwa:abstract paintings of Korea Artist CHOI MYOUNG YOUNG,최명영 화백,최명영 작가,단색화 최명영,단색화:한국추상회화 화가 최명영,모노크롬회화 최명영,단색화가 최명영,韓国単色画家 崔明永,韓国の単色画家 チェイ·ミョンヨン)의 저[3년간] 작품에서 [허,실]이 하나로 된 구조에 의해 실현시킨 회화라고 한다면 이번에는 [허]와[실]을 밀착시켜나가면서 분리 되는 구조에 의해 실현시키고 있다.
[허]와 [실]이 밀착하고 있기 때문에 이 [펼침]은 결국 좁아진다고 할 수 있다. 마음과 감각과 신체의 위상만 으로 한정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더라도 그것은 [회화] 이 면서도 [새로운]회화인 것이다.
△치바 시게오(千葉成夫), 미술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