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79년 2회 개인전(선 화랑), 남편 이량

-당시 그림을 혹시 보관하고 계시진 않나요? 워낙 자료를 잘 모아두시잖아요.

아니요. 한데 기억에는 고스란히 남아 있어요. 이른 아침의 이슬이 맺힌 풀과 나무 들을 그린 것이 특히 그래요. 꼭 교복을 입고, 모자까지 다 쓰고서 그림을 그리는 아주 작은 중학생 소녀였죠.

그렇다고 일찍 두각을 나타내거나 한 것은 아니에요. 오히려 거꾸로 예요. 그림으로 상을 받은 기억이 별로 없거든요. 창덕여고로 진학해서도 계속 그림을 그렸는데, 홍익대학교에서 주최한 실기대회에 참가했지만 상을 받지 못했어요.

칸나 꽃을 그리는 거였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청소년기의 입시미술과는 상관없이 내 식의 그림을 그린 탓이 아닌가 싶어요. 가을이면 국화꽃을 들여다보며 섬세하게 그리던 기억도 있는데, 그런 작업이 입시미술과는 다른 것이었어요.

선생님에게서 인가. 책에서인가, 빛에 따라 색이 다르다는 말을 듣고는 강렬한 인상을 받아서 빛 아래 드러난 대상을 정밀하게 관찰하는 훈련을 혼자서 하곤 했어요. 인상파 회화와 관련된 이야기라는 것은 나중에 알았고, 어쨌든 전체 덩어리를 생각하지 못한 채, 자신이 관심을 갖는 것에만 집중적으로 매달렸으니 입시미술과는 맞지 않았던 거죠.

그래서 요즘도 입시심사를 가면, 입시풍이 아니더라도 자기만의 색깔이 있는 그림을 드물게 보곤 하는데 참 안타까워요. 내가 도와줘도 결국 좋은 결과를 못 얻을 텐데, 하지만 좌절하면 안 되는데 어쩌나' 하는 마음이죠.

▲ 54.5×53㎝

-입시미술에서의 실패가 영향을 많이 끼친 모양이네요?

그래요. 나는(한국화가 송수련,한지화가 송수련,송수련 화백,宋秀璉,SONG SOO RYUN,송수련 작가,Hanji Painter SONG SOO RYUN,한지작가 송수련,종이회화 송수련,여류중견화가 송수련, KOREA PAPER ARTIST SONG SOO RYUN, KOREAN PAPER ARTIST SONG SOO RYUN) 내내 미술반 반장을 했는데, 실기대회에서 실패를 거듭했으니까 특별히 공부를 잘 한 것도 아닌데, 어쩐 일인지 학교에서 계속간부를 맡았어요.

다른 학생의 모범이 되어야한다는 생각에 과도하게 시달린 나머지 꼭 교복을 입고 교모를 쓰고 외출하는 버릇도 생겼고, 새벽같이 일어나서 공부하고 그림을 그리고 대상을 관찰해야 한다고 강박적으로 스스로를 몰아갔어요. 지금도 늦게 자고 일찍 일어나는데 청소년기부터 몸에 익은 습관의 결과라고 생각해요.

▲ 1984년 선화랑

친구들과도 잘 어울리지 못했어요. 대학에 계신 아버지 덕에 집으로 공부하는 분들이 자주 찾아왔는데, 당시 대학원생이었을 그분들의 이야기를 어깨 너머로 들으며 지적, 예술적 욕구를 해소할 수 있었거든요. 그래서 특별히 또래 친구들과 무슨 교류를 해야 한다는 욕구를 느끼지 못했어요.

일부러 교류를 피하지는 않았지만 이상하게도 절친한 우정의 기억이 남아 있질 않아요. 입시에 대한 불편함이 청소년기를 어둡고 우울하게 수놓은 것이죠. 우울증과 자괴감이 생길 정도였으니까 특히 대학 진학에 실패하면서는 그림 그리는 일 자체에도 커다란 위기가 왔으니까요.

△글=박철화, 중앙대학교 예술대 문예창작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