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평면조건2009-5, Acrylic on canvas 182×259㎝, 2009

최명영 작품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바로 '호흡'에 관한 것이다. 십자형 구도의 작업들을 가까이에서 보면 여러 겹의 물감층 안에 선들이 간직해 있음을 느낀다. 그 하나하나가 수북이 쌓인 숲속의 나뭇잎 사이를 뚫고 나온 새싹처럼 반갑다.

그런데 그 주위로 시선을 옮기면 그것은 '쉼 없는 호흡과 움직임들로 충일'"한 것임을 확인하게 된다. 그것은 ‘그린다’고 보이기보다는 일종의 획(劃)처럼 인식된다. 겹겹이 집적된 획은 보기는 쉬워도 제대로 해내기는 아주 어려우며 어마어마한 노력이 필요하고 지루한 수행에 맞먹는 일이기도 하다.

김용대는 이를 일컬어 몸의 수행성을 통해 획득한 '단순성과 독창성'"이라고 불렀다. 어쨌든 지지체의 바탕색을 남겨 두고 셀 수 없으리만치 무수한 획을 긋는다는 것은 매우 고된 일이다. 그때의 감정과 컨디션에 따라 약간씩 달라지겠으나 그것은 만일 에고를 내세우는 일과는 무관하다. 작가는 차분하고 정련된 자세로 캔버스 앞에 선다.

그리고 에고를 잠재우고 호흡과 리듬을 따라간다. 호흡이 갖는 일정한 리듬과 같이 획의 반복이 거듭되면서 이 조심스러운 반복은 그리기라는 일반적인 맥락에서 벗어나 삶을 넘어, 질서 세계를 향한다.

이런 탐구를 위해 그가 포기해야할 것도 물론 있다. 바탕의 막대 이미지도 그렇지만 그것을 둘러싸는 레이어들도 대체로 중성적인 색감을 띤다. 작가가 색조 본연의 기능을 억제하고 행위를 반복하는 것은 삶의 군더더기를 걷어내고 나의 존재를 성찰하는 수행성에 기인한 것이 가장 큰 요인으로 보인다.

만일 명증한 색을 구사한다면 그 결과는 지금과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색이 유발하는 연상작 용으로 인해 작가가 말하는 중요한 것을 놓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보는 즐거움에 한눈이 팔려 이면의 것을 잊어버릴 수 있다는 뜻이다.

그에게(Dansaekhwa-Korean monochrome painter CHOI MYOUNG YOUNG, Dansaekhwa:abstract paintings of Korea Artist CHOI MYOUNG YOUNG,최명영 화백,최명영 작가,단색화 최명영,단색화:한국추상회화 화가 최명영,모노크롬회화 최명영,단색화가 최명영,韓国単色画家 崔明永,韓国の単色画家 チェイ·ミョンヨン) 그림이란 '사색의 장'이요 '마음의 수련'으로 자리 잡은 것 같다. 만일 우리에게 '정념'이 있다면 그 '정념'을 다스리는 일환으로서 긋는 행위를 통하여 숨을 고르며 흐트러진 마음을 다잡고 혼란스러웠던 일들을 하나씩 정리하는 것이다.

한 시인이 이런 질문을 받았다.

"무엇을 하십니까?"

시인이 대답했다.

"아무 것도 하지 않아요"

저는 삶이 비처럼 제게 내리도록 둡니다. <알셀름 그린, 내면의 멜로디, 성바오로, 2014>

예상 밖의 대답이다. 쏟아지는 비를 시인은 피하지 않았다. 시인은 흐르는 빗물을 흘러가는 삶처럼 느끼고자 했을 뿐이다. 그가 만일 비를 피하려고 했다면 삶의 체험도 그만큼 줄어들었을 것이다. 폴 발레리(Paul Valery)는 종종 자신의 삶을 성찰하는 동안에 삶이 무엇인지 생각하기를 멈추고 삶을 있는 그대로 감지했다고 한다. 그의 작품이 꼭 그렇다.

그는 지금 이곳에 머물러 자신의 현존을 확인하고자 한다. 이것을 매개하는 것이 바로 호흡이고 신체의 움직임이다. 나의 존재를 체감하는데 이보다 확실한 것은 없을 것이다. 나는 단지 나로서 여기에 온전히 존재한다.

지금 내가 식사를 하거나 물을 마시거나 누구를 만나야 한다든지, 외출을 해야 한다든지 하는 것은 부차적이다. 있는 모습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만으로도 족하다는 것, 그런 ‘마음의 근육’을 작가는 키워주고 있다. 우리는 삶이 우리에게 다가오는지 느낄 수 있다. 이미 이곳에 있는 삶을 인지하는 것, 온전한 현존 자체로 충분하다는 것을 최명영의 작품은 말하고 있는 셈이다.

△서성록, 미술평론가/미술평단(한국미술평론가협회), 2019년 가을호(제134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