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평면조건, 2007

켄 가이어(Ken Gire)는 "그림은 어디에도 있으나 그림이 아니라 창(窓)"으로 인식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즉 2차원의 액자 너머로 뭔가를 볼 수 있는 눈을 가져야 한다는 뜻이다. 우리가 그의 그림을 '창'으로 바라보면 어떤 일이 생기는가? 부분에 집착하기보다 그림을 통해 작가가 전달하고자 하는 바를 파악할 수 있다.

그림은 말로 할 수 없는 것의 표현이고 이상(理想)의 구체화이요 '내적인 삶'에 대해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 같은 점은 90년대 초반 이후 등장한 십자형 구도의 작품을 이해하는 실마리를 제공해줄 수 있으리라 본다. 작가는 1년간의 영국체류(1990-1991) 이후 회화로 돌아가 붓을 들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가(Dansaekhwa-Korean monochrome painter CHOI MYOUNG YOUNG, Dansaekhwa:abstract paintings of Korea Artist CHOI MYOUNG YOUNG,최명영 화백,최명영 작가,단색화 최명영,단색화:한국추상회화 화가 최명영,모노크롬회화 최명영,단색화가 최명영,韓国単色画家 崔明永,韓国の単色画家 チェイ·ミョンヨン) 붓을 든 것은 무엇을 그리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60년대 기하학과 색면을 활용한 추상을 할 적에도 분할된 화면에 채색을 위하여 붓을 사용한 적이 있지만 그때와 사정이 사뭇 달랐다. 붓을 든다는 것은 보다 직접적으로 지각하고 느끼는 것들에 대해 언급한다는 표시로 읽히며, 그 결과는 화면을 바탕색 위에 중성적인 색깔을 반복적으로 입히고 가로 세로로 붓질을 함으로써 종국에는 바탕에 가로줄과 세로줄만 남기는 방식을 말한다.

“근작에서 볼 수 있는 특징은 화면에 감도는 보다 열려진 '자연스러움 '이라 할 것이며, 그 자연스러움은 화면을 뒤덮고 있는 흑 또는 백색의 대범스러운 색조 조절과 그 화면 위에 드러났다 다시 사라지는 듯한 선조의 처리에서 나타나고 있는 듯이 보인다. 다시 말해서 색조나 선조가 다 같이 균질적으로 통제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균질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이일, 여백공간으로서의 회화세계, 최명영의 평면조건전 도록, 묵화랑, 1992>

우리가 그의 작품을 '창문'으로 인식했을 때 그의 작품은 하늘에서 내려다 본 지상의 풍경으로 이해될 수도 있으며 어슴푸레한 도시의 이미지로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작가의 생각은 물리적인 세계를 넘어선다. 작가에 의하면 '수직은 역사를, 수평은 현실을 말한다'고 한다.

본래적으로 사람은 누구나 주어진 굴레를 벗어나기 힘들며, 역사적 상황 속에 틀지어진 인간으로 살아간다는 뜻이다 보다 거시적으로 보면 이것은 우리의 인생과도 견줄 수 있지 않을까? 우리는 모님 사이에서 태어나서 삶의 행로를 타고 여행하다가 우주로 간다. 우주적으로 설계된 시스템 속에서 우리는 궁극적 실재가 구성되는 질서의 지배를 받게 마련이다. 이 질서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이를 기초로 하는 사회에서 사는 이들은 이것을 내면화할 수밖에 없다.

△서성록, 미술평론가/미술평단(한국미술평론가협회), 2019년 가을호(제134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