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76년 현대차원전 오픈. 최영애, 이설자, 박설희, 나의 오른쪽 오현주, 김수길 그리고 안상철 선생<사진제공:송수련 작가>

-그래도 화가가 되기로 결심하는 데는 어떤 특별한 계기가 있지 않을까요?

특별히 그렇지는 않았어요. 다만 창덕여중에 들어가면서 그림에 대한 욕구를 강렬하게 느꼈어요. 늘 집에서 그림을 그렸는데, 아버지의 서재와 컬렉션이 주 대상이었어요. 연희전문을 졸업하고 도쿄로 유학을 가 릿쿄대학교에서 공부를 한 아버지는 전공은 경제학이었지만 다방면에 관심이 많은 분이었어요.

그래서 여러 가지 컬렉션을 갖고 계셨어요. 도자기, 고서화, 카메라, 커피기계 등. 특히 서재에 유화가 한 점 있었는데, 코발트블루 바탕의 화분에 꽃이 있는 그림이었어요. 그 그림은 흥미로운 내력을 가진 것이었는데, 아버지의 도쿄 유학시절 하숙집 여주인이 준 작품이었다고 합니다. 외모가 고왔던 그분은 유화를 그렸다고 해요. 그 인상이 강렬하게 남았던지 아버지는 딸 셋 모두에게 그림을 배우도록 했습니다.

제가 맏이고, 두 여동생이 있는데, 바로 아래 동생은 조소를, 막내는 서양화를 했습니다. 막내는 지금도 현역화가로서 작업을 하며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어요. 어쨌거나 아버지가 갖고 계신 그림을 보면서 자극을 받아 집에 있는 식물들을 그리기 시작했죠. 어머니가 너른 마당에 많은 꽃과 풀을 기른 덕분에 그림의 소재는 널려 있었어요. 과일나무도 많았고, 특히 아홉 그루나 되는 큰 소나무는 정말 근사했어요.

또 여름날 아침 마당에 나가면 아카시나무 이파리가 노랗게 땅에 떨어져 쌓이곤 했는데, 가을이 아닌 계절에 노랗게 이파리를 떨구어놓은 모습이 애틋하면서도 아름다웠어요. 마당이 넓다보니 긴 호스로 물을 주는데도 미처 미치지 못하는 구석이 있었어요.

거기서 자라는 식물들이 안타까워서 어떻게든 물을 부어주려 하기도 했지요. 화초를 길렀다고 해서 서양식으로 깔끔하게 정돈하며 가꾼 것은 아니고 자연스럽게 내버려두다시피 기른 것인데, 나중에 보니 그게 우리의 전통 정원을 가꾸던 방식이더군요.

장독대 근처에 맨드라미가 잔뜩 피어있는 풍경 같은 것이죠. 어쨌거나 꽃과 나무를 그리면서 자연이 참 아름답다고 생각했어요. 감수성이 아주 예민하던 시절에 타인과의 대화보다 자연이

라는 거대한 대상과의 교감에 치중하느라 말수가 적은 내향적인 사람이 되지 않았나 싶어요. 자금도 낯을 많이 가리고 자연 속에 있는 것을 훨씬 더 좋아하지요.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좋은 친구가 하나 있었어요.

정굉미라고 나중에 소설가 조해일씨의 부인이 되었죠. 어릴 때부터 문학소녀였는데, 둘이서 함께 국립 서울현충원에 가서 나는 그림을 그리고, 그 친구는 독서에 열중하곤 했어요. 그곳에는 글라디올러스 밭이 펼쳐져 있었거든요.

▲ 89×83.5㎝, 1980년대 초

-장독대의 맨드라미가 전통의 풍경이라면, 국립서울현충원의 글라디올러스 받은 서양적인 모던한 풍경이네요.

그런 셈이네요. 당시까지만 해도 국립서울현충원의 출입통제가 엄격하지 않았어요. 안으로 들어가면 화장사라는 절이 있었는데, 거기서 나는(한국화가 송수련,한지화가 송수련,송수련 화백,宋秀璉,SONG SOO RYUN,송수련 작가,Hanji Painter SONG SOO RYUN,한지작가 송수련,종이회화 송수련,여류중견화가 송수련, KOREA PAPER ARTIST SONG SOO RYUN, KOREAN PAPER ARTIST SONG SOO RYUN) 스케치도 하고 수채화를 그렸어요. 여름방학이면 매일 한 장씩 그림을 그리는 계획을 세웠어요. 이상 하게 겨울방학의 기억은 없어요.

▲ 1976년 현대차원전. 김수길, 오현주

-추웠겠죠?

밖에서의 특별한 기억이 남기에는 워낙 추울 때니까. 그랬을 거예요. 대신 여름이면 아주 더워서 머리에 물을 적신수건을 얹고 작업을 하곤 했어요. 매일 새벽 사람들 눈을 피해 이젤을 들고 국립서울현충원으로 넘어 들어가 그림을 그렸어요.

당시에는 그림 그리는 사람이 드무니까 이젤을 들고 다니면 이상하게 봐서, 사람들 눈을 피하려고 새벽같이 나가는 거예요. 우스운 이야기인데, 멋으로만 이젤을 들고 다니는 사람들도 있던 시절이죠.

△글=박철화, 중앙대학교 예술대 문예창작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