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69년 졸업전에서 송수련

-그러면 열 살 무렵, 전쟁의 흔적이 좀 정리된 서울로 돌아온 것이군요?

네. 2학년 말에 돌아와 3학년부터 5학년까지 지금 혜화동의 낙산 너머 동신초등학교를 다니며 신설동 집에서 지냅니다. 그러고는 연세대학교에 계시다 중앙대학교로 자리를 옮긴 아버지를 따라서 흑석동으로 갔어요. 일본인들이 남긴 적산가옥이었는데, 한강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고급 주택가에 위치한 베란다가 있는 3층집이었어요.

당시 어머니가 건강이 좋지 않았어요. 여름에 이사를 했어요. 그때는 아주 먼 거리라고 느껴졌어요. 중간에 명동을 지나며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는 모습을 처음으로 보았구요.

5학년 2학기부터 지금도 흑석동에 남아 있는 은로초등학교를 다녔어요. 재미있는 것은 당시 만해도 한강 건너는 시골이라고 생각했는지, 외할아버지가 그 시골에 가서 어떻게 사느냐며 걱정을 많이 하셨어요. 그리고 방학이면 외가쪽 사촌들이 일주일씩 집에 와서 놀다 갔어요. 그들에 거는 우리 집에 다녀가는 게 한강변에서 보낸 일종의 바캉스인 셈이죠.

흑석동은 그만큼 외진 곳이었어요. 거기서 대학교 4학년 1학기까지 살았습니다. 강변에 갈대가 무성하고, 모래톱에는 자그마한 만물조개가 박혀 있고 겨울이면 파랗게 얼어붙은 강에서 쩡쩡 소리가 나곤 했지요. 운동을 특별히 좋아하거나 재능이 있지는 않았지만 한겨울이 지나서 강물속이 녹아 멀리서 보면 얼음이 울렁울렁 하는 게 보일 때까지 스케이트를 타곤 했습니다. 이상하게도 늘 혼자서 탔어요.

▲ 권영우 화백 개인전. 화백내외분과 친구들, 1966<사진제공-송수련>

-그림과의 만남은 언제부터인가요?

흑석동으로 이사하기 전이에요. 동신초등학교 3학년 때, 친구와 함께 사생대회에 나갔어요. 풍경화를 그리는 실기대회였지요. 보문사라는 절에서 대회가 열렸는데, 나중에 서양화를 전공하게 된 친구는 상을 받고, 나는 받지 못했어요.

그때 나뭇잎을 묘사하려고 애쓰던 기억이 있어요. 미제 크레용을 썼는데, 이상하게 내가 원하는 색이 나오질 않는 거예요. 그래서 속이 탔죠. 이게 그림과 연관된 최초의 기억이에요. 그다지 유쾌한 기억은 아니네요. 원하는 대로 그림은 잘 만들어지지 않고, 상은 놓치고….

그렇다고 그 장면이 특별히 속상하게 남아 있진 않아요. 사실 어머니가 문학과 예술에 관심이 많은 분이었어요. 당시 숙명여전, 그러니까 오늘날의 숙명여자대학교에서 신학문을 공부하신 분인데, 늘 한복을 입고 생활하신 전통적인 여성이지요.

결혼과 함께 며느리, 아내, 엄마 역할을 하시느라 처녀 시절의 꿈은 접었지만, 그래도 틈만 나면 문학작품을 읽고 마치 낙서하듯 그림을 그리곤 하셨어요. 약간 긴 단발에 갸름한 소녀의 얼굴을 그리곤 했는데, 몸은 빼고 얼굴만 있는 묘한 분위기의 그림이었습니다.

그렇게 늘 책을 끼고 그림을 그리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며 자연스럽게 그림의 세계와 만난 거예요. 특별한 계기 없이 그냥 그림을 그리며 사는 게 나에게(한국화가 송수련,한지화가 송수련,송수련 화백,宋秀璉,SONG SOO RYUN,송수련 작가,Hanji Painter SONG SOO RYUN,한지작가 송수련,종이회화 송수련,여류중견화가 송수련, KOREA PAPER ARTIST SONG SOO RYUN, KOREAN PAPER ARTIST SONG SOO RYUN) 주어진 삶인 줄 알았어요. 그래서인지 미술시간을 즐거워하고 특별활동도 늘 미술반을 선택했어요.

△글=박철화, 중앙대학교 예술대 문예창작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