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익명인간-이미지에 중독된 이야기, 1998, 종이, 수묵채색, 아크릴, 포스터, 320×820cm/Anonymous Human-Story Addicted to Images, 1998, paper, ink, pigment, acrylic and poster, 320×820cm

우리의 관심은 작가가 작품의 주체로 등장한 이후 그림을 통한 현실의 개조(해체)의 의욕과 복원(개벽)의 시도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다루어지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그가 지금까지 구어 온 <서술적 순환체제>의 방법이 그대로 지속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긴 하나 이전보다는 많이 감소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예컨대 상징이미지들 가운데서 과거의 이미지들 가령 산수도, 한문, 민화, 18사략의 이야기와 같은 단순히 화두적 성격을 갖는 것들로 제한하는 한편 주로 현대적 사건들에서 발견되는 형상들, 특히 인간의 신체와 손, 얼굴, 동체같은 신체의 부위들이 작가의 초상과 관련해서 대거 등장하고 있는 것이 눈에 띈다.

이 때문에 이번 개인전은 오늘의 상황과 시간에 중심을 둔 미래의 예감도를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 특징이다. 이를 위해 그는 화면구성에 있어서 연대기적 순환병열법이 아니라 개조하고자 하는 현실의 단면들을 연작해서 꼴라주하는, 문자 그대로 <해체주의적>방식을 차용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가령 비교적 구조가 간단한 ‘익명인간-고도를 기다리며Ⅰ’과 같이 세 개의 단면들이 시리즈로 제작된 경우를 예로 들 수 있다. 이 작품에는 좌우 양쪽에 절규하는 서술태의 자화상을 설정하고 이것들 가운데다 전통 산수와 민화풍의 패턴(꽃)을 중첩시켜 그린 고도를 삽입하고 있다.

▲ 익명인간-현대산수도1, 1998, 한지에 수묵채색, 112×432cm/Anonymous Human-Modern Sansudo1, 1998, ink and pigment on hanji, 112×432cm

‘익명인간-현대산수도Ⅱ’역시 두 점의 전통산수풍의 산과 하천, 그리고 서술풍의 자유를 갈망하는 군상을 엮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으로 읽혀진다. 이러한 제작방식은 해체되어야 할 현실의 국면들에 차례로 맞추어진 회화적 국면들의 면면들이라고 할 수 있다.

산수화풍으로 그려진 자연생태계가 훼손되기 이전으로 복원되어야 한다는 것은 물론이고 옛 회화로서의 산수화풍 자체가 또한 오늘의 회화로서 새 의미를 갖지 않으면 안 되리라는 기대가 모두 이러한 방식으로 다루어지고 제시된다.

이를 두고 해체주의적이라는 주석을 달게 되는 것은 그의 작품들이 사적 순환의 연속개념보다는 차이와 단절의 양식들을 차례로 배열함으로써 읽고자 하는 자의 의도에 따라서 비교적 자유롭게 읽을 수 있게끔 허용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그의 그림을 읽고 감상하는 자는 그림들 배후에 그가 미래에 던지는 인간과 현실의 복원 가능성에 대한 열망을 그 어느 때보다도 짙게 깔아 놓고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게 된다. 요컨대 허진의 근작 세계는 그림과 현실, 자연과 인간, 인간과 사회가 공존할 터전을 예감하면서 지금까지 다루어 온 역사주의적 순환논리에서 다의적, 다중적 <신역사주의의 자연논리>를 선택하는 쪽으로 기울고 있음을 보여준다.

‘익명인간-일상성의 7가지 색’연작이 시사하는 것은 그 하나의 좋은 본보기자 절정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 동물, 유형, 무형, 암호, 혼돈, 질서 등 여러 카테고리를 동시에 적용할 수 있는 이미지들의 복합을 시도하고 있는 이 작품들은 그의 근작들이 장차 어디로 지향할 것인지를 예견케 한다.

넓게 보아 그의 근작들은 역사가가 미래를 위해 지웠다 다시 쓰는 현실의 이야기요, 이러한 의미에서 해체와 복원을 위한<담론>으로서의 그림이라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 해체와 복원을 시도한다는 점에서 제3회전까지 일구어 온 <현실비판>중심의 그림들을 뛰어 넘으려 했다고 할 수 있다. 이번 제4회전은 향후 그의(ARTIST HUR JIN,許塡,허진 작가,한국화가 허진,HUR JIN,허진 교수,허진 화백,A Painter HUR JIN) 회화세계가 나아 갈 새로운 틀을 모색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김복영(미술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