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6x32cm, 1963

<전문>

송수련 화백은 한국화 외길을 걸어오고 있다. 송 작가가 한국화를 배우고 익혔던 시절의 스승들은 해방이후 한국근현대미술의 맥을 이은 중요한 미술사적 위치에 있는 분들이 대부분이다. 송수련 작가가 오랫동안 간직하고 있던 스냅사진들을 장시간 선별하여 제공해주었다. 또한 이글은 박철화 교수(중앙대학교 예술대 문예창작학과)가 수회에 걸친 취재결과물로 구성한 대담을 작가가 제공, 재구성했음을 밝힌다.<편집자 주>

한국화가 송수련은 서울내기다 1945년 8월15일 광복의 기쁨이 충만하던 날 아침 서울에서 태어났다. 서울 출생이란 점은 단지 지리적 기호가 아니라, 그의 세계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전통 회화를 전공하고서도 일찌감치 추상의 길을 걸은 것은 서울내기란 사실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물론 생의 모든 선택이 분명한 이유를 갖는 필연은 아니다.

스승의 영향일 수도, 시대의 흐름일 수도, 또 여러 가지 우연이 작용한 결과일 수도 있다 하지만 송수련의 세계에서 자연은 도시라는 드러나지 않는 배경을 갖고 있다. 긴장은 대조 혹은 대립에서 오는데, 그의 자연은 도시라는 보이지 않는 배경과의 관계 속에서 힘을 얻는 것으로 보인다.

자연에 대한 관심은 도시에서 자란 그에게 일종 의 균형감각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자연이 단순히 삶의 무대라기보다는 특별한 미적 대상이어서, 물질적 의미를 넘어 교감이 필요한 정신적인 것으로 승화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가 자연이라는 사물의 저 깊은 곳, 즉 자연의 영혼을 찾는 화가라고 생각한다.

▲ 153x110cm, 1970년대 초

◇어릴 적 이야기로 시작할까요?

동대문구 신설동의 할아버지 댁에서 컸어요. 넓은 뜰이 있는 2층 양옥집이었는데, 할아버지가 은행 지점장을 지내셨기 때문에 당시로써는 좋은 집이었어요. 본채 옆에 기물을 넣어두는 헛간 같은 곳이 하나 있었고, 마당에는 할머니가 키우신 박꽃이 피어 있었어요.

바이 열렸는지는 기억에 없는데, 그 하얀 박꽃만큼은 또렷하게 기억해요. 그 집을 담쟁이덩굴이 온통 뒤덮고 있었어요. 창문으로 덩굴이 기어들어와 손짓하듯 하늘거리기도 했지요. 요즘 제가 사는 상도동 집에 담쟁이덩굴을 올리려 애를 쓰는데, 어느 날 그게 내 어릴 적의 풍경을 되살리고 싶다는 소망의 표현이란 걸 알았어요.

마당에는 포도나무가 한 그루 있었는데 가꾸질 않아서 송이가 탐스럽게 열리거나 하지는 않았어요. 그렇게 되는대로 방지한 듯한 포도나무 주위로 상사화가 피던 기억이 남아 있어요. 마루 앞에 붓꽃이 한 무더기 피어 있었고, 안개꽃을 닮은 흰 꽃들이 피어나는 나무가 있었는데, 돌아가신 어머니는 그 꽃을 늘 가스미소라고 불렀어요. 일본어 이름일 텐데 지금도 그 뜻을 정확하게는 잘 모르겠어요.

▲ 53x45.5cm

◇아주 어릴 때의 풍경인데 그런 걸 모두 기억하시네요?

아니요, 지금 기억하는 신설동 집의 풍경은 열 살 무렵의 것이에요. 열 살 이전에는 인천에서 자랐거든요. 할아버지가 인천으로 전근을 가셨는데, 맏이였던 나를 예뻐하신 할아버지 내외분께서 사택으로 저를 데리고 가 함께 지내길 원하셨어요. 사택은 큰 건물로 계단이 여러 개 있어서 동네가 다 내려다보이는 언덕 집이었어요. 집 옆에 할머니가 가꾸신 토마토 밭에서 이리저리 뛰어놀던 기억이 생생해요.

◇행복한 풍경이군요.

많은 사람들의 어린 시절이 그렇겠죠. 하지만 그 사이에 전쟁이 있었지요.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났더니 유리창이 모두 깨져 있고, 사람들이 모여서 수런거리더군요. 어렸기 때문에 정확히 잘 몰랐지만 무슨 일이 일어났구나' 하며 가슴을 졸였어요.

리어카 짐 위에 누가 괘종시계를 얹어놓았는데, 커다란 시계추가 덩그러니 놓인 풍경이 또렷해요. 하지만 전쟁을 절절하게 경험하진 않았어요. 오히려 잘 모르고 지났어요. 인천 앞바다 작은 섬 풍도로 피난을 가서 별일 없이 돌아왔거든요.

오히려 인천에 얽힌 한 가지 특별한 기억이 있는데, 어느 날인가 민들레 잎을 따니 하얀 액이 나오는 거예요. 궁금해서 입에 대보았더니 정말 쓴맛과 함께 알싸한 향기가 느껴졌어요. 풀이파리의 향기였겠죠.

나는(한국화가 송수련,한지화가 송수련,송수련 화백,宋秀璉,SONG SOO RYUN,송수련 작가,Hanji Painter SONG SOO RYUN,한지작가 송수련,종이회화 송수련,여류중견화가 송수련, KOREA PAPER ARTIST SONG SOO RYUN, KOREAN PAPER ARTIST SONG SOO RYUN) 그런 게 무척 궁금했어요. 왜 파란 풀에서 하얀 액이 나올까 게다가 맛이 이토록 쓸까 하는 의문들, 자연이 궁금한 것으로 가득 차 있다는 생각을 했죠.

△글=박철화, 중앙대학교 예술대 문예창작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