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가 밝았다. 모두 새해 좋은 일만 가득 하시라는 인사로 글을 시작하고 싶다.

그런데, 살면서 무엇이 얼마나 좋으면 제목처럼 ‘죽어도’ 좋을까?

2002년 개봉했던 영화 ‘죽어도 좋아’ 에서는, 배우자와 사별을 한 일흔이 넘은 남녀가 죽음보다 외롭게 하루하루를 연명하다가 운명처럼 만나 뜨거운 사랑을 나누는 이야기를 그린다.

몇 년 전 필자를 찾아온 50대의 남자환자는 틀림없는 돌출입이었다. 중장년에 돌출입 수술을 원하는 분들이 거의 그렇듯, 그에게도 돌출입은 평생 맘속에 사무친 콤플렉스였다.

그런데 문제는 그 환자는 정말 ‘환자’였다. 돌출입 수술을 하러 병원에 왔으니 건강하고 멀쩡한 사람을 편의상 ‘환자’라고 부르는 것과는 결이 달랐다. 간이 아팠다. 다름 아닌 간경변 환자였다. 간경변, 즉 간경화는 간염, 술, 독소 등에 의한 후유증으로 간이 섬유화되어 딱딱하게 굳는 질환이며 만성적이고 비가역적인 위중한 질환이다.

돌출입수술은 대부분 미용성형수술이다. 건강이 더 우선인 것은 물론이다.

필자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 환자분, 간경화가 있으신데 미용 목적으로 전신마취해서 뼈수술을 하는 건 너무 위험합니다.

환자를 돌려보냈지만, 얼마 후 다시 찾아오셨다.

대학병원에서 검사를 주기적으로 하는데, 현재 간수치도 정상이니 괜찮지 않냐는 거였다.

그럴듯했다. 그래도 웬만하면 말리고 싶었다. 간수치가 정상이라고 해서 모든 간기능이 정상이라고 속단하기는 어렵고 전신마취나 얼굴뼈수술 시 어떤 긴박한 상황이 생길지 모른다.

 

-꼭 그렇게 수술을 하고 싶으세요?

-네 원장님. 꼭 좀 수술해주세요. 저는 돌출입으로 관에 들어가고 싶지 않아요~

-네?

 

환자는 막무가내지만 묘하게 설득력이 있고 귀여운 구석이 있는 캐릭터였다. 환자 이야기를 좀 과장하자면, 돌출입만 사라지면 ‘죽어도 좋아’나 다름없다. 돌출입이 얼마나 이 분의 마음을 짓눌러왔는지 알 만했다.

환자의 확고한 의지에 필자의 마음이 흔들렸다. 그럼 일단, 대학병원 담당 교수에게 현재 간경화 정도와 전신마취가 가능한지 여부에 대해 소견서를 받아오시라고 했다. 사실 일종의 안전장치이기도 하고 필터링이기도 하다. 그 단계에서 수술 불가 판정이 나면 환자도 수긍할 것이다.

아이처럼 신이 나서 돌아간 환자의 뒷모습을 보며 안타까웠다. 미용성형 수술하겠다고 전신마취 되냐고 물어보면, 담당의에게 혼쭐이 날 게 분명하다.

그런데 웬걸. 며칠 뒤 다시 필자를 찾은 환자의 손에는 간경변이 경도(차일드 등급 A)이며 전신마취 수술이 가능하다고 쓰여있는 것이 아닌가? 이쯤되면 돌출입수술을 못 해 드리겠노라고 할 명분이 없어진 것이다. 고민은 필자와 마취과장의 몫이 되었다.

결국 환자는 필자에게 돌출입수술을 받았다.

물론 전신마취로 수술했고, 몇 년이 지난 지금도 마취과장이 두고두고 왜 그때 그 마취를 해드렸는지 자신도 모르겠다고 회고하는 잊지 못할 케이스가 되었다.

우선, 수술 전에 신선냉동혈장(FFP:fresh frozen plasma)를 열 팩 정도 준비했다. 영양소 대사, 해독 등 간이 하는 일은 아주 많지만, 혈액응고인자를 만드는 것 역시 간이 담당한다. 물론 수술 전 지혈시간 검사가 아슬아슬하게 정상범위이긴 했지만, 만약 수술을 하는데 피가 잘 멎지 않는다면 문제가 되기 때문에, 혈액응고인자가 포함된 혈장을 미리 준비한 것이다. 체내 수분량의 투입, 산출 계산을 위해 소변줄도 끼웠다. 필자의 돌출입 수술을 몇 년 째 가까이서 봐온 마취과장은 ‘한 원장이 수술하니까 마취해드린다’고 했다.

환자를 퇴원 직후 전원해 입원시킬 2차 병원도 미리 정해 마련해 두었다.

마취가 시작되고 수술도 시작되었다.

출혈이 예사롭지 않았다. 지혈하는데 손이 바빴다, 신선동결혈장을 지속 주사했다. 수술 중 혈압이 불안정해 특수 수액과 약으로 혈압을 조절해야했다. 그래도 돌출입수술을 예정대로 끝냈다. ‘그 어려운 걸 해냈지 말입니다’, 바로 드라마 대사에 다름 아니었다. 마취를 깨우는데도 시간이 꽤 걸렸다. 보통 수술 직후 거의 생기지 않는 멍이 환자의 입 주위와 턱에 이미 푸르스름했다.

지금도 수술 후 병실에서 필자의 손을 꼭 잡으며, “원장님 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하고 인사하던, 넉살 좋은 환자를 생생하게 기억한다. 무슨 간암수술이라도 해드린 것 같은 날이었다.

생각해보면 수술 전 검사에서 간경변이 경미해도 간수치나 혈액응고수치가 정상인 것은 잘 관리가 되는 일상생활에서나 해당되는 말이다. 아픈 간은 전신마취와 수술이라는 신체의 스트레스 앞에서 바람 앞의 등불과도 같다. 다행히 등불이 견뎌냈다.

퇴임식이나 송년회에서 ‘대과 없이’ 직장생활을, 혹은 한 해를 마무리해서 기쁘다고들 한다. 2019년의 일은 아니었지만, 큰 허물이나 잘못으로 귀결되지 않은 것은 환자에게도 의사에게도 정말 다행스러운 일이다.

사실 이런 아찔한(?) 임상경험에 비하면, 특별한 질환 없이 건강한 환자들의 돌출입수술은 상대적으로 단순하다. 긴박한 수술장 풍경에 겁먹은 독자도 있겠지만, 수술 전 건강검진을 통해 전신마취에 적합한지 체크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돌출입수술은 보통 한 시간 이내에 끝난다. 사실 건강한 환자의 돌출입수술이나 얼굴뼈수술은, 일반적으로 출혈도 많지 않고 쉽게 지혈되며, 바로 멍이 들지도 않는다. 원래 빈혈이 없다면 수혈할 일도 없으며, 소변줄도 끼우지 않는다.

한편, 간경변 환자 이후에 꼭 필자에게 돌출입수술을 받고야 말겠다는 심장 아픈 환자가 있었다. 승모판 협착증을 가진 여자환자였는데, 역시 대학병원을 꾸준히 다니고 있고 경증이라는 판정이 담긴 대학병원 소견서도 받아 왔었다. 간경변 환자로 고생했던 마취과장이 도저히 마취가 어렵겠다는 판단을 내려 결국 수술을 해주지 못했다. 사실 환자의 안전을 위해 백번 맞는 말이다. 부천에 있는 심장수술 전문병원과 협진도 기획했지만, 병원 간 물리적 거리가 멀다는 이유로 관계기관으로부터 협진병원 승인이 나오지 않아 그것도 불가능했다. 이도 저도 안 되니, 미안한 마음에 환자에게 대학병원으로 가시라고 했지만 그건 싫다고 한다. 안되면 잊어야 맘 편하게 사는데, 필자를 믿어주는 분에게 항상 풀지 못한 숙제처럼 마음이 쓰인다. 예술적인 결과도 중요하겠지만, 무엇보다 환자의 안전을 중요하게 여기는 마음을 알아주시리라 믿는다.

2020년이다.

죽어도 좋은, 그렇게까지 미친 듯이 좋은 일만 있을 수는 없을 것이다.

새로운 한 해, 소소한 일상의 즐거움을 느끼며 대과 없이 지낼 수 있길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