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중인간(多重人間)-가면이야기, 1992, 여러 종이에 수묵채색, 180×270cm/Multiple Human-Mask Story, 1992, ink and pigment on several kinds of paper, 180×270cm

허진은 이러한 인체에 대한 충격적 해석을 선적인 묘사의 거부와 화면 내의 공간구성의 제한, 그리고 이와 함께 병행되는 제한된 색채영역의 발현을 통해 실현하고 있다. 충격적으로 표현되고 잇는 인체는 부패의 이미지를 나타내며, 그 부조적 질감을 통해 다분히 후각적 이미지가 환기되고 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후각은 인간의 감각 중 가장 원초적인 것이며 동시에 가장 강한 환기력을 갖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허진의 작품들의 부패에 대한 시각적 반성이 후각적으로 음미될 수 있다는 것은 일견 지나친 가지각적 현상의 부각이라고 반박될 수 있는 소지가 있다. 특히 합리적 인식을 강조하는 입장에서라면 이러한 지각은 극히 비합리적이며 인식의 미성숙 단계로 치부될 가능성이 있다.

▲ 다중인간(多重人間)-거대한 역사이야기, 1993, 여러 종이에 수묵채색, 244x722cm/Multiple Human-Talking about Huge History, 1993, ink and pigment on several kinds of paper, 244x722cm

하지만 작품을 만들어내는 작가의 입장에서 그린다는 행위가 인간의 정신활동을 포괄하는 총체적인 개념으로 받아들여질 때, 그의 작품을 감상하고 평가하는 우리의 입장에서도 그 이미지에 대한 적극적인 의미부여가 필요한 것이다. 이 점을 해결해줄 수 있는 것은 작품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상상력이다.

감상에 있어서 상상력의 발휘는 현실 원칙과 유리된 비현실적인 기능을 하는 것이 아니라, 정태적이지 않은 작가(ARTIST HUR JIN,許塡,허진 작가,한국화가 허진,HUR JIN,허진 교수,허진 화백,A Painter HUR JIN)의 정신이 움직여간 원초적인 흔적을 추적할 수 있는 적극적인 힘을 우리에게 부여해주는 것이다.

이 점은 “실제는 오직 예술작품에서 개별적으로 표현된 직관적 경험을 통해 이룩될 수 있다”는 베르그송(Bergson)의 전언과도 일치하는 것이기도 한다.

△이종숭/미술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