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회(懷), 1989, 여러 종이에 수묵채색, 122×180cm/Bottom of One’s Heart, 1989, ink and pigment on several kinds of paper, 122×180cm

허진은 전통적으로 정신적 면이 강조됐던 지필묵(紙筆墨)을 실험적인 효용성을 추구할 수 있는 물성(物性)으로 전환시키고 있다. 어떻게 보면 전통적 재료와 기법이 갖는 정신적인 측면을 배제하고 물성과 자신이 개발한 기법으로 새로운 형상을 부여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단순히 함축적이거나 문인화적인 그리고 암시적인 전통의 조형방법에 대한 거부였지만, 원천적인 재료와 기법에 있어서는 그 뿌리를 같이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전통화의 철학이 현실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는 것으로 판단하고, 생활과 일치하는 철학관을 제시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철학관의 표출을 위해 그는 전통 한국화에서는 묵에 대한 보조적 역할에 불과했던 색(色)을 적극적으로 변환시켜 다양한 형상의 발현이 가능케 했다. 이렇듯 전통적인 화론의 방법들을 자신의 체질에 맞게 현대적인 조형어법으로 개발하고 구사함으로써 그의 독특한 서술적 화면을 연출해 보인 것이다.

그 연출의 가장 근원으로는 주제의 현실성과 재료 기법의 혼용에 의한 다양성으로 축약될 수 있다. 특히 재료 기법의 다양한 구사에 따른 혼란과 산만함을 방지하기 위해 유기적 질서를 부여하고 있는데, 이는 두 가지 방법으로 설명된다. 그 하나는 화선지를 재로로 하면서 화선지를 적극성을 띤 양적(陽的) 의미로 파악하고 화선지를 구겼다 펼쳐서 얻는 독특한 방법이다.

구긴 후 펼치면 마치 칼로 형상을 해체한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방법을 그는 인물의 형상화에 적용시킨다. 이렇게 해서 해체된 형태는 현대인의 소외나 비인간화, 부조리 등 현대사화의 비판적 정신을 담아내고 있다.

▲ 묵시(默示)6, 1990, 여러 종이에 수묵채색, 244×366cm/Implied Apocalypse6, 1990, ink and pigment on several kinds of paper, 244×366cm

또 다른 방법으로는 장지를 바닥에 눕혀 물을 붓고 그 위에 물감이나 먹을 뿌려 흡수성이 강한 종이를 구겨서 덮는 기법이다. 장지에 묻은 먹이나 물감이 흡수성이 강한 종이에 의해 흡수되어 묻어나는 상태에 따라 조각조각 나누어지는 효과를 얻게 된다.

이러한 효과는 화선지에 인물을 다루는 것과 달리 일상적 사물을 표현하는데 쓰고 있다. 이것 역시 그가 계획한 의도를 충분히 살릴 수 있는 조형어법의 하나인 셈이다. 이러한 방법들에 대한 개진을 작가는 대학 4학년 때부터 계획했다고 하나, 조형론의 학업만으로는 소화하기 불충분해 내용의 충일을 연구하면서 그 조형을 조금씩 진전시켜 나갔다.

그 결과 그는 여러 형상들을 복합적이면서도 통일된 주제의식으로 부각시켜 놓았다. 여러 개의 이미지가 하나의 새로운 이미지로 환기되는 이러한 작업을 통해 작가는 자신의 일상적인 체험을 여러 삶의 체험과 결부시키면서 공동체적인 문제로서 제기하고 있으며, 현대문명에 대한 해결점을 모색하고자 노력하는 것이다.

그러나 작가가 안고 있는 과제는 스스로가 지적했듯이 ‘형상성’의 추구 속에서 빚어지는 모호성의 소화와 복합성에서의 산만성의 처리, 그리고 일정한 수준에서의 한계점을 극복하는 것이다.

그는(ARTIST HUR JIN,許塡,허진 작가,한국화가 허진,HUR JIN,허진 교수,허진 화백,A Painter HUR JIN) “일관성 없는 것을 불식하고 시종일관하는 동인(動因)들로 된 애매성에의 실현은 앞으로의 과제로 남아 있으며, 다의성을 바탕으로 한 복합성에서 그러한 점을 수용하되 단일화(單一化)로 지향하는 데 주력하고자 한다.”고 말함으로써 자체의 진단과 더불어 발전을 꾀하고자 하는 것으로 보인다.

△미술평론가 김리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