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等式 75-33, 146.5×112㎝ Oil on canvas, 1975

화면의 균질을 꾀하는 동안 질료(質料)에서 물성(物性)이 제거되고, 정신화(情神化)된 구조물이 된다는 방법적 전개과정에서 최명영이라는 존재의 사라짐을 실천하려 하고 있지만, 그 결과는 정반대로 최명영이라는 존재를 더욱 뚜렷이 바깥으로 내몰고 있음을 목격하게 될 뿐이다.

왜냐하면 그 작업의 결과가 너무 독특한 것이기에 곧바로 최명영을 연상하게 되고, 또 실감할 수 있게 됨으로써 존재성이 더욱 강렬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물론 이 때의 존재성이란 단적으로 인간으로서의 최명영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최명영이 있음으로써 얻어지는 이른바, 보이지 않는 격(格)의 그림자가 바로 존재성일 것이다. 또한 이 격의 그림자가 심리학적 측면에서의 내향성(內向性)과 뜻을 함께 한다면 최명영의 작업이 어디서부터 비롯되었는지 좀 더 쉽게 파악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 이유는 한 인간의 성격형성 과정에서 생활환경이 미치는 영향은 거의 절대적이라는 아동심리학을 들지 않더라도 인격형성과 더불어 조성된 미의식에 대한 성장기의 심인(心印)이 한 작가의 예술세계에 불가분의 작용을 하리란 사실을 결코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 여기에서 그의 어린 시절과 만나 그의 작품에 영향(影向)하였으리라 짐작되는 몇 가지 사실들을 추적해 보기로 한다. 황해도 해주(海州)가 고향인 그는 이미 어릴 때부터 감수성이 예민하여 “비가 오는 날이거나 어둠이 내릴 무렵이면 집 앞 오동나무의 커다란 잎이 음산하게 흔들리는 것을 보며 남달리 무서움을 느끼곤 했었음”을 기억한다.

뿐만 아니라 해방 이후 공산치하에 있을 때 지주(地主)들에 대한 체포령이 내려 야음(夜陰)을 이용하여 온 가족이 용담포를 거쳐 탈출하던 그 긴박한 상황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으며, 국 민학교 2학년 때 6.25를 만나 다시 뗏목을 타고 이름 모를 섬으로 피난을 떠날 때의 그 절망적인 기분을 지금껏 잊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패잔병(敗殘兵)이라든지, 서로 먼저 배를 타려고 아우성치던 피난민들, 그리고 부상병을 싣고 가던 앰블런스가 바다 속으로 굴러 떨어진다든지 하는 따위의 처참한 전쟁의 모습을 수 없이 목격하게 됨으로써 여린 그의 감수성을 크게 다치고 말았던 것이다.

더구나 적 치하(敵 治下)에서 보내던 때의 그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미묘한 어두움에 싸여 성장해온 최명영(한국단색화 최명영, Korean monochrome painter CHOI MYOUNG YOUNG, Dansaekhwa CHOI MYOUNG YOUNG, 최명영 화백, 최명영 작가, 단색화가 최명영, 韓国単色画家 崔明永)은 “열등감이 많고, 내성적이며 염세적(厭世的)인” 성격을 갖게 되었다.

그러다가 인천 사범학교에 들어가면서 잠재의식(潛在意識)속에 남아 있는 성장기의 인상들을 보다 확실한 것으로 남기기 위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때마침 정상화(鄭相和)선생님의 부임으로 그림에 대한 눈을 뜨게 되었고, 동시에 본격적인 그림수업에 들어갔다. 수업이 끝나고 나면 그는 미술실에 남아 혼자 그림을 그리곤 했지만 무언가 자신도 모르게 언제나 불만에 차 있었다.

붓으로 그림을 그린다는 일이 도무지 시원스럽지가 않아 “살을 대고 비비적거리고 싶고, 물감 속에 푹 빠졌다 나온 것 같이 온 몸으로”표현하고픈 충동을 느끼곤 했다. 사범학교에 입학할 때만 하더라도 선생이 되어야겠다는 결심이었으나 예술행위를 통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발산(發散)할 수 있음을 깨닫게 되자 3학년 때 선생이 될 것을 포기하고 만다.

△신항섭, 미술평론가(現代美術의 位相, 화성문화사刊, 19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