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묵시(默示)4, 1988, 여러 종이에 수묵채색, 200×340cm/Implied Apocalypse4, 1988, ink and pigment on several kinds of paper, 200×340cm

사실 작가는 대학을 졸업하면서 ‘작품의 내용’ 표출에 대한 고민을 무엇보다 심각하게 했었다. 그의 말을 빌면 학부 때 배운 것은 ‘조형성’이라는 형식표현의 방법론이 대부분을 차지했기 때문에 내용의 충일을 가져올 방법들의 모색이 필요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대학을 졸업하고 내용성의 빈곤을 채울 방법을 개진하게 되었다. 이때 그는 정신적 방황을 했다고 하는데, 그것은 그림이라는 것이 테크닉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철학 등의 내용이 견실해야 된다는 인식을 하면서부터 이를 시작하였다.

이후 철학 등 많은 인문학 서적을 탐독하거나 사색을 하는 등의 방법으로 내용빈곤에 대한 해결을 모색했었다. 그의 모색은 가끔 학부 때 익혔던 조형론의 방법들을 학문과 사색으로 고민하고 찾아 헤맸던 내용성과 접목을 시도함으로써 가시화되기 시작했다.

말하자면 지금의 전체적 구조를 이루는 부분의 화면들이 바로 방황하던 시절의 노력에 의해 이룩된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시기는 일상적 체험이라는 주제를 확실하게 다진 시기라고 할 수 있다.

▲ 무(無), 1989, 여러 종이에 수묵채색, 120×180cm/Nothing, 1989, ink and pigment on Several kinds of paper, 120×180cm

허진의 작품 내용이자 주제인 ‘일상적 체험’은 개인의 차원에서 출발하지만 우리 혹은 역사라는 개념에서 파악되고 추구되고 있다. 그것도 구체적 이미지를 제시하는 형상성을 축으로 전개되고 있다. 그 형상성 속에는 우리의 일상 속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요소들이 많다.

마치 형(形)과 색(色)으로 조형화한 한 편의 드라마틱한 일기처럼 펼쳐진 그의 그림에는 일상인과 일상사물들이 서술적으로 등장하고 있다. 괭이를 든 농민, 연설하는 정치가, 노래하는 가수 등 우리의 주변인물들이 일기의 주인공처럼 등장하고 있으며, 그들 주변에는 여러 많은 사람들과 사물들이 다면적으로 새롭게 이미지화하고 있다.

그것들은 한 인간의, 한 일상의 존재로만 머무르지 않고, 역사적인 존재로 실존함을 보여준다. 이렇듯 작가의 예술적 시각이 다층적으로 확장되고 있는 것은 그의 작업이 단순히 개인적인 유희나 무의미한 작의성에 의존해 있지 않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사실 그의 그림은 여러 조각들의 화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화면들은 추상 혹은 형상으로서 테크닉이 십분 발휘된 영상미를 보여준다.

화면 개개의 상태를 들여다보아도 하나의 이미지임에는 틀림없는데도 불구하고 그것들을 다른 화면상의 이미지와 상호 대비적으로 연결시킴으로써 전혀 새로운 이미지로 환기시켜 놓는 것이 허진(ARTIST HUR JIN,許塡,허진 작가,한국화가 허진,HUR JIN,허진 교수,허진 화백)의 작품세계가 갖는 조형적 미감이다. 이렇듯 형상성으로 표출되는 주제를 그는 여러 개의 화면으로 구체화시키고 있다.

△미술평론가 김리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