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等式 74-K, 1974년

물질과 정신이라는 결코 융합(融合)될 수 없는, 이원화(二元化)된 두 조건을 합일(合一)하여 물질의 정신화(精神化)를 꾀할 수 있다는 사실은 수도자적(修道者的)인 자기절제(自己節制)를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그의 방법에는 높은 지적체험(知的體驗)이 뒷받침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여기에서 지적체험이란 사상(思想)의 달변(達辯)을 뜻함이 아니라 묵상(默想))과 같은 정신의 집중일 수가 있다. 이러한 정신의 집중은 작품을 위한 행위와 따로 분리시킬 수는 없을 것이다. 행위 속에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정신의 깊이가 바로 지적체험일 것이기 때문이다.

최명영 작품 속에 나타나는 ‘적막감(寂寞感)’은 무엇인가. 사전(辭典) 풀이와 같은 「고요하고 쓸쓸함」일까. 그러나 이 같은 설명은 단순한 느낌에 불과할 뿐이다. 그림에 나타나는 ‘적막’이란 우리의 전통화인 동양화(東洋畵)에서 엿보이는 격(格), 즉 화격(畫格)을 의미한다.

하나의 사물 또는 실체를 그렸을 때 그 사물 또는 실체를 감싸고 있는 여백(餘白)이 있게 마련인데 이 여백이 화면 전체를 채우고 있어 거기에서 받는 인상(印象)이 우리의 마음속에 적막감으로 다가서는 것이다.

동양화에서는 전혀 생소한 느낌의 사물 또는 실체가 별안간 화면에 나타났을 때 비롯되는 팽팽한 긴장감을, 이 여백이 부드럽게 감싸게 됨으로써 화면속의 사물 또는 실체는 비로소 영원성을 유지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여백은 결코 손쉽게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 감정(感情)을 다스릴 줄 알아야만 된다. 감정을 그대로 표출하지 않고 마음으로 거른 후에 거기에 남는 것만을 화면에 옮겨놓음으로써 완성되는 동양화는 어쩌면 엄밀한 의미에서 정신의 작업이라고까지 단언할 수 있는지도 모른다.

사물을 화면에 옮길 때의 감격(感激) 즉 격한 감정이 마음을 통해 여과(濾過)되고 순화(醇化)되어 형체가치(形體價値)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때의 형체가치를 예술로서 인정하는 것이 마로 여백인데 이 같은 여백이 바로 최명영의 작업에서 감지(感知)된다.

물론 여기에서 여백의 의미는 아무것도 없는 텅 빈 공간(空間)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격(格)이 담긴 그래서 아무것도 없는 가운데 문자기(文子氣)가 느껴지는 실체의 공간을 뜻한다.

그렇다면 무엇으로 하여금 최명영의 작업에서 실체의 공간을 느낄 수 있게 하는가. 되풀이 하거니와 최명영의 작품에는 동양화에서 볼 수 있는 형체가 전혀 없다. 그렇다면 무엇을 근거로 실체의 공간을 설명할 수 있을까.

굳이 찾아낸다면 작품 속에 은거(隱居)하고 있는 최영명(CHOI MYOUNG YOUNG, 최명영 화백, 최명영 작가, 화가 최명영, 崔明永) 자신의 존재성(存在性)이라고나 해야 할 것이다.

작가의 존재성을 드러내려 하지 않는, 다시 말하면 표현욕구를 다스리는 가운데 오히려 더욱 분명하게 부각(浮刻)되는 작가의 모습이 바로 존재성이며, 이 존재성으로 말미암아 아무것도 없는, 그래서 동양화의 여백이나 다름없는 무표정한 평면이 실체의 공간으로 되살아나는 것이다.

△신항섭, 미술평론가(現代美術의 位相, 화성문화사刊, 1982)